한국 축구 지도자들에게 김호는 이렇게 말했다
김호의 호기로운 말은 한국 축구를 향한 사랑에서 나온다
백발의 노(老) 감독은 여전히 호기로웠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힘은 여전했다. 때로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한국 축구의 대부’ 김호는, 특유의 에너지로 축구 지도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위치한 용인시 축구센터. 조용한 산 속에 자리잡은 이곳은 석현준(FC 포르투), 오재석(감바 오사카) 등을 배출한, 한국 유소년 축구 육성의 요람이다. 김호는 새싹들이 물을 머금고 자라나는 이곳에 있다. 지난해 6월부터 용인시 축구센터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수차례 정상에 올라섰던 김호가 용인시 축구센터를 축구 여정의 종착지로 택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육성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김호는 “축구 인재 육성을 도와 달라”는 정찬민 용인시장의 말 한마디에 연고도 없는 용인으로 왔다.
어린 선수들을 향한 열정으로 매 순간이 행복한 이곳에서, <ONSIDE>는 김호와 마주 앉았다. 후배 축구 지도자들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요즘 지도자들처럼 화려한 언변에 학구적인 스타일은 아니었다. 마치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무용담이 꽤 날카롭다.
‘경험’을 의심하라
1973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김호는 2년 뒤 모교인 동래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첫 지도자 생활을 준비하면서 그가 했던 다짐이 있었다. 바로 ‘전문성 있는 지도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얼마나 아는지, 얼마나 모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절대 자만하지 말고 배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축구라는 물결은 정말 빠르게 지나가기에, 세계 축구의 추세를 지도자가 먼저 배워서 가르쳐야 한다는 걸 김호는 1970년대에 깨달았다. 공부의 중요성이다.
“사실 나는 중학교 때 지도자들의 문제점을 많이 느꼈었지. 전문 지식이 없이 관습으로 선수들을 가르치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었어. 그때는 지금처럼 축구를 인터넷이나 책으로 배우던 게 아니었지. 오로지 관습이었어. 이러면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까? 절대 안 통해. 내가 만약 지도자가 된다면 절대로 그런 폐단은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어.”
“관습에 의존하면 결국은 세계 흐름과 동떨어진 축구를 하게 돼. 결국은 이런 사실을 아는 좋은 지도자가 당시에는 부족했던 것 같아. 나는 무조건 잘 배워서 체계적으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어. 선수 시절 독일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유럽 축구는 정말 큰 인상으로 남았지. 그동안 우리가 못 보고, 못 배운 게 너무 많은 거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유럽 축구는 김호의 오랜 지도자 생활의 버팀목이 됐다. 무엇보다 ‘기다림의 미학’을 알게 됐다. “요즘 축구는 ‘당장 쓰고 버리는’ 게 많은 것 같아. 지도자도 선수도 마찬가지야. 축구는 유럽에서 만들어졌고, 유럽의 좋은 점을 가져와서 융화시키면 발전이 훨씬 빨라. 믿고 기다리는 문화, 그게 핵심이야. 감독이든 선수든 잠깐 데리고 와서 쓰고 버리면 같은 상황의 반복일 뿐이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진출을 하면서 팬들의 눈은 높아졌는데, 우리가 못 따라간다면 관중은 결국 없어질 거야. 좋은 점을 받아들여서 미래를 준비해야지.”
정신력은 곧 평정심, 위기 탈출의 지름길
김호의 축구 지도자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도하의 기적’이다.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이다. 당시 대표팀 전임감독 1호로 본선 진출의 특명을 받은 김호는 엄청난 부담과 압박을 견뎌야 했다. 당시의 대표팀은 1986 멕시코 월드컵,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경험했던 베테랑들이 대부분 은퇴한 상황이었고, 자연스레 세대교체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김호가 이끄는 대표팀은 최종예선 첫 경기인 이란전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고 일본전에서는 패배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인 북한전, 자력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표팀은 북한을 무조건 이기고 일본과 이라크전의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위기 상황을 앞두고 김호가 선수들에게 던진 말은 의외로 단순했다. ‘배운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나서지도 말고, 물러서지도 말고 그저 배운 대로만.
“선수들에게 해줬던 말이 있지. ‘준비된 사람만이 이길 수 있다. 배운 대로 하라’고 말이야. 사실 축구란 건 억지로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 평정심을 유지하고 배운 대로 하는 거지. 배운 대로 하다보면 결국 자신의 팀이 유리하게 돼. 당시에는 그게 잘 들어맞은 것 같아. 결국 북한을 상대로 세 골을 넣고 본선에 가게 됐잖아. 일종의 ‘정신 무장’이라고 봐도 되겠네. 월드컵 본선에 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이 필요했고, 그걸 선수들에게 적극적으로 주문했지.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해.”
김호의 대표팀은 ‘도하의 기적’을 발판으로 미국 월드컵 본선에 올랐지만, 좋은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16강 진출에 아쉽게 실패했다. 하지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아직 아시아 축구는 세계에 나가서 우승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때 월드컵 본선에 나가면서 나의 목표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경기’를 하는 것이었어. 급하게 갈 이유가 하나도 없었지. 우리는 무턱대고 우승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최소 우승을 생각하려면 세계 10위권 이내에 들어가야지. 10위권 안으로 들어가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질을 높이지 않고 급하게 가기만 하는 건 문제 아닐까?”
외국인 유소년 선수 육성, 어떠한가?
김호가 뽑는 최고의 순간은 바로 1996년부터 2003년까지 8년 동안의 수원 삼성 감독 시절이었다. 특히 2001년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 고종수와 데니스, 산드로로 구성된 ‘고데로 트리오’는 당시 34골 12도움을 합작하며 정규리그 3위와 컵 대회 우승은 물론이고 아시안클럽 챔피언십(AFC 챔피언스리그의 전신) 우승까지 견인했다. 당연히 수원의 황금기는 외국인 선수들의 공이 팔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외국인 선수를 위한 김호의 체계적인 컨트롤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간혹 외국인 선수 관리에 실패해 갈등을 겪는 팀들이 있다. 갈등은 곧 팀 분위기를 저하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김호는 무조건 퍼주거나, 요구하는 걸 경계했다. 공존이 핵심이다. 외국인 선수와 공존한다는 마음이 정착돼야 그 위에서 발전이 이뤄진다는 생각이다.
“내가 남한테 잘하면, 남도 나한테 잘한다? 이건 기본이야.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봐야 해. 외국인 선수가 우리 팀에 와서 어떤 도움이 될지, 축구 기술은 물론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폭넓게 봐야겠지. 기술과 생각은 같이 가야 하거든. 이렇게 판단해서 괜찮은 외국인 선수가 오게 되면 지도자는 이 선수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거나 새로 만들 필요가 있어. 그렇게 해서 우리의 문화를 이 선수가 빨리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겠지. 무조건 우리 스타일만 요구한다? 그러면 곧 거부감을 나타낼 거야.”
일찌감치 가능성 있고 어린 외국인 선수들을 데려와서 육성해 온전한 팀의 선수로 만드는 방안도 제시했다. 비싼 몸값의 외국인 선수들을 불안정하게 데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프로 팀 감독을 했을 때 구단과 유소년 육성 방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었어. 비싼 외국인 선수들을 데려와서 단번에 질적으로 높이기에는 어렵거든. 우리 환경에 맞는 축구를 원활하게 구사하기 위해 외국의 어린 선수들을 7명 정도 데려오자고 했지. 2군에서 같이 훈련하면서 육성시키는 거야. 이것도 세계 축구의 흐름인데, 왜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는 건지 늘 이야기했어.”
“우리는 우리 것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면 발전이 늦을 수밖에 없지. 유럽을 보면 서로 교류를 많이 하잖아. 그래서 발전이 빨라. 왜 우리는 문을 닫아놓고 있을까? 어린 선수들은 성인 선수들에 비해 돈도 많이 안 드는데 말이야.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일찍 데리고 와서 육성하면 훨씬 효과적인데 그런 걸 안 해.”
대화 속에 답이 있다
김호는 용인시 축구센터로 부임한 뒤 한 가지 문화를 정착시켰다. 바로 토론 문화다. 매일 아침 김호를 포함한 용인 FC 백암(백암중), 용인 FC 원삼(원삼중), 신갈고의 지도자 12명은 아침마다 모여서 훈련 계획과 문제점에 대해 토론을 나눈다. 체계적인 선수 관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아침에 모든 지도자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30분 정도 토론을 해. 그동안은 토론 문화가 너무 없었거든. 오늘 일정, 일주일 일정, 한 달 일정을 정해놓고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진행되지 않는다면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야. 각자 일을 하다보면 대화를 할 시간이 없어.”
토론을 통해 얻는 건 많다. 일정 공유 및 문제점 파악, 해결은 물론이고 선수 개인의 현재 심리상태나 상황들을 알고 이에 맞는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대화 속에서 힌트가 나온다.
“대화는 기본이야. 하다못해 선수들의 음식, 잠자리는 어떤지 개인적인 문제는 없는지 자잘한 상황들도 대화를 통해 알아낼 수 있지. 컨디션과 직결되는 문제들은 대화로 섬세하게 관리해야 해. 장비도 마찬가지고.”
김호가 한국 축구에서 이뤄놓은 수많은 업적들은 끝없는 고민의 결과물이다. 그 어떤 화려함 없이 우직하게 한 길만을 걸어왔다. 쓴소리들도 다 한국 축구를 사랑하기에 나오는 것이다. “내가 평생 축구를 좋아했으니, 한국 축구가 잘 되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래서 후배 지도자들이 기본적인 부분을 잊지 않길 원한다.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지도자들이 잠시 잊고 사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준비된 사람만이 할 수 있어. 절대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 축구화를 벗는 순간까지, 축구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 그 이상 답이 뭐가 있을까?”
*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4월호 '지도자의 길'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안기희
사진=FA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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