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대표,축구가 가져다 준 짧지만 강렬한 힘
짧지만 강렬했다. 김종원 우리신용정보 대표이사(57)가 현재의 위치에 서게 된 원동력은 바로 짧게 스쳐지나간 축구였다. 그는 축구로 인생을 배웠고, 끈기라는 선물을 받았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도 절대 잊지 못할 고마움이다.
축구와의 짧은 만남
김종원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친형이 축구를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자신도 좋아하게 됐다. 중학교 진학시기가 다가오면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방법은 체육특기생에게 지원되는 전액 장학금이었다. 대한축구협회 정식 등록 팀이 있는 학교를 물색해야 했고, 결국 고향인 통영을 떠나 부산동래중으로 전학했다.
“축구가 너무 좋았죠. 기술이나 실력도 기본 이상은 했었어요. 마냥 축구하는 게 좋아서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습니다. 축구 말고 다른 걸 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후 김종원 대표는 고등학교 축구의 전통 명문인 부산상고(현 개성고)로 진학해 축구선수의 꿈을 계속 키워나갔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부산상고가 워낙 명문 팀이고, 선수층이 탄탄하다보니 제가 그 사이에서 주전으로 뛰는 건 힘들더라고요.” 1학년 후반기에 가까스로 기회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부상의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허리디스크가 발병한 것이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2학년 때는 거의 뛰질 못했어요. 3학년 때는 연습에 주기적으로 참여하진 못했어요. 간혹 경기를 뛰긴 했죠. 대학에 진학해서 운동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가정 형편도 별로 나아지질 않았거든요.”
김종원 대표는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때마침 한국상업은행 축구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그 곳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상업은행 축구단에서도 허리는 여전히 말썽이었다. “1971년 12월 중순에 효창운동장에서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 출전할 청소년대표 최종선발전이 열렸죠. 그 경기에 나갈 수 있었는데, 허리수술을 결정하고 나가질 않았어요. 그리고 수술 후 1년을 쉬다가 결국 일찍 은퇴를 하게 됐습니다.”
승진가도를 달리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은퇴 후 3~4년은 거의 매일 꿈속에서 축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상업은행 축구단 소속이었던 그는 자연스레 자신의 진로를 은행원으로 잡았다. “그 때 당시에는 축구선수라고 하면 공부를 안 하는 이미지가 팽배했죠. 선입견이 심했어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제가 제 자신을 채찍질해서 도전해보고 싶었죠.”
그 때부터는 공부 또 공부였다. 어엿한 은행원이 되기 위해 회계, 은행법 등 해야 할 공부가 많았다. 독학으로도 했고, 은행에서 실시하는 연수도 받았다. 특혜는 없었다. 승진하려면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경쟁해야 했다. 비록 아픈 허리 때문에 긴 시간을 투자하지는 못했지만,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공부하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집중했다.
“힘들었냐고요? 아니요. 축구보다는 덜 힘들었어요. 뭐든지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 같아요. 축구선수들은 집중력이 좋고 승부근성이 있어요. 자존심도 있죠. 그래서 승진 시험도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저는 일반 직원들보다 빠르게 승진한 편입니다. 축구선수 시절에 겪었던 힘들고 어려운 경험들이 자양분이 됐어요.”
그렇게 은행 생활에 차근차근 적응하던 김종원 대표는 2010년 우리은행(편집자주: 상업은행은 2001년 우리금융지주에 편입되면서 이듬해 우리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부산 모라동 지점장을 시작으로 승진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은행 부행장을 거쳐 올해부터 우리은행의 자회사인 우리신용정보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아직도 회사에서는 저를 축구선수 이미지로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앞서 언급했지만, 옛날에는 축구선수가 공부를 안 한다는 이미지가 강했거든요. 제가 축구선수였기 때문에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욕을 안 먹게 하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축구의 근성과 다양한 경험이 가능성으로
지금도 김종원 대표는 조기축구회와 사내 동호회에서 축구를 즐겨한다. 해외축구도 틈나는 대로 챙겨본다. 축구선수와 은행 임원 중 무엇이 더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주저 없이 축구선수를 꼽는다. “축구는 제가 즐거워서 한 일이잖아요.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것도 축구가 가져다 준 근성과 끈기의 힘이 컸어요. 단순히 부산상고 학생으로 졸업했으면 은행 임원이 되기는 힘들었겠죠.”
경영 철학에서도 축구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다. “제가 선수 시절에 미드필더였어요. 미드필더는 수비, 공격, 어시스트, 골 등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하죠. 팀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책임이 있어요. 결정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빠르게 판단해서 앞으로 패스를 줄 것인지, 수비로 돌릴 것인지 결정해야하기도 하죠. 그런 점이 은행 경영과 비슷한 것 같아요.”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 가능성을 잡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중도 탈락의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사는 축구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김종원 대표는 자신과 같은 고민을 했던 후배들에게 경험을 많이 하라고 조언했다. 대표적인 예가 독서다.
“평소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만화책, 소설책, 전집 다 좋아요. 책을 많이 읽는 게 다 간접 경험이 되죠. 부산상고 시절에 제가 자청해서 선수들에게 신문 사설을 쓰자고 했었죠. 옛날 신문에는 한자가 많잖아요. 다 공부가 되죠. 축구 선수의 근성에 이런 노력들이 더해진다면 가능성은 더 많아질 거예요.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물줄기를 만들어냅니다. 많은 축구 후배들이 이런 생각을 가졌으면 해요.”
*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3월호 '축구인 전성시대'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안기희
사진=FA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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