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이야기

[스포츠인권 칼럼] 공부하는 학생선수 만들기

용의꿈 2016. 4. 20. 15:07


[스포츠인권 칼럼] 공부하는 학생선수 만들기


 


체육특기자들의 명과 암

우리나라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둘 때 언제나 그 전면에는 화려한 모습의 스포츠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가 그런 영광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소수의 메달리스트들과 프로스포츠에서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스포츠스타들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그런 선수들이 만들어지기 위해 우리 스포츠꿈나무들이 치러 내고 있는 대가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학창시절부터 경기력 향상을 위해 당연시 되고 있는 장기간의 합숙훈련과 학습권의 박탈은 학생들을 운동하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 학생선수들의 하루 일과를 들여다보면 새벽에 일어나 새벽훈련을 하고, 오전에 수업에 참가하고, 오후에는 훈련하고, 그리고 저녁에 훈련하고 취침에 드는 일상의 반복이다. 일부 수업에 참가하기는 하지만 계속되는 훈련에 공부는 뒷전이 되기 일쑤다. 무엇보다 문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박탈된 학습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와 담을 쌓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초가 없으니 뒤 늦게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지금 학교에서 운동부를 하고 있는 학생선수들은 학생인가, 선수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1972년 대학입시제도에서 이른바 체육특기자 특례입학제도가 생겨난 이후부터 이 문제는 줄곧 우리 학원스포츠계가 안고 있는 폭탄 같은 것이었다. 초중고에서 운동하는 친구들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대학진학이다. 심지어 경기력을 바탕으로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데 공부와 운동 중 한 군데 집중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이들은 공부를 접고 운동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나 부모들은 자신들을 학생보다는 선수로 배려했으면 하는 마음이 클 것이다. 어쭙잖게 공부를 강요하지 말고, 운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학교 당국이 도와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반면 학생으로 불리고 싶은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우리나라 체육특기자 제도 자체를 비판하게 된다. 도무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서 공부를 강조하고,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현실이 불안하다. 지도자들에게 공부이야기를 꺼내기 껄끄러우니 아예 학교에서 강제적으로라도 학생들 공부시키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둘의 생각은 무엇이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스포츠인권 현장에서는 학습권 보장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학생으로서 누려할 권리인 학습권을 박탈하는 것은 인권침해이며, 이것은 기성세대가 학생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권리 중 자유권에 기반 하여 공부하지 않을 권리도 있으니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육 당국이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의 생각이 맞을까?

공부하는 여건은 누가 만드는가?

학생선수들이 학습권이 박탈된 주요 원인에는 교육부 이하 학교 당국 방임과 지도자의 강제, 그리고 학부모들의 요구가 있었다. 이 세 주체들의 호흡이 잘 맞으면 학습권을 완전히 박탈할 수도 있고, 보장할 수도 있다. 대개와 같이 학습권 문제가 현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간의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당국의 방임은 교육부의 묵인 아래 각 학교장이나 담당자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 운동부를 키우려고 마음먹은 학교는 운동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는 미명아래 학습권 박탈을 은근히 종용한다. 반면 학생이 운동보다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학교는 학생선수들의 수업 참가를 강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학교의 의지에 따라 고용이 결정되는 불안정한 지도자들은 눈치를 살피기 마련이다.

운동부 지도자들은 대부분 계약직이고, 계약의 조건은 팀의 성적과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운동부 지도자도 대개 가정을 건사해야 하는 생활인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해서든 현재의 직장을 유지해야하는 욕구가 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의 운동시간을 줄여가며 공부를 시키자는 것은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밥그릇을 걸고 학생들을 공부시키자는 말과 같게 들린다. 그리고 학부모들도 내 자식의 진학이 걸린 일에 무관심하지 않다. 좋은 학교에 좋은 조건으로 진학할 수 있는 학부모들은 이미 내 자식이 운동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운동을 더 시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반면 진학이 불투명한 부모들은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데 학습권을 박탈한 학교가 야속하게 보이기도 한다. 혹시 모를 반전을 꿈꾸며 계속 운동을 시키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 때 아이가 원하기 때문이라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수순이다.

그러나 학습권 보장의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운동부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는 학교당국, 지도자, 그리고 학부모 중 누군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학교운동부, 체육특기자 등의 개념이 모두 학교 안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학교가 교육기관인 이상, 우리 사회가 교육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결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백년지대계인 교육에 대한 철학이 이들을 운동기계로 전락시킬 수도 있고, 지덕체가 고루 겸비된 전인으로 양성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이 문제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 학습권을 보장해야 하는가?

현행 체육특기자 제도의 특성상 운동선수들의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다. 운동선수 생활의 지속, 각 종목의 지도자 등이 오랜 운동부 생활이 가져다주는 전부이다. 이렇게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많은 상황에서 지금까지 노력한 학업을 바탕으로 다른 직업 선택의 길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공부하는 운동선수’개념의 요지이다. 최근 교육 당국의 생각은 운동으로 인한 위광 효과에 비해 희생되는 체육특기자의 수가 너무 많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공부하는 학생선수’라는 개념을 통해 학생 스스로 운동에서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제고하는데 관심이 갖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최근 기성세대의 생각은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도 의료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더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도 학업의 중요성과 연관된다. 이른바 100세 시대가 열리면서 인생이 은퇴이전과 이후로 나누던 이모작의 시대에서 삼모작을 해야 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통섭(Consilience)으로 유명한 생물학자 최재천은 이런 직업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학능력을 갖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기나 긴 인생에 있어서 뭐든 배우고 변신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것은 100세 시대에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핵심이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 체육특기자들은 이런 점에서 수학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무언가 다른 진로를 선택할 때 그만큼 두려움도 크고, 가능성도 줄어들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체육특기자 제도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학이 만든 입시제도이다. 따라서 대학이 체육을 특기로 하는 운동선수를 선발했으니 교육의 책임도 대학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들에게 수학능력과 관련한 교육을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너무 멀리 온 것이다. 초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멀리하던 학업이 일시에 해결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대학이 이 모든 문제로부터 회피하려고 하는 태도는 대학의 사회적 책무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대학 입시 제도를 손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학생선수들은 물론 학교, 지도자, 그리고 학부모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에 보내기 위한 사교육시장은 이미 도를 넘어 선 수준이다. 그만한 경쟁 사회에서 운동선수인 자녀들을 위해 이 정도 경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운동선수로서의 성공 이면에서 낙오되는 더 많은 학생운동선수들을 위해 조금 더 즐겁게 운동할 수는 없을지, 지도자와 선수의 관계가 긴장관계가 아니라 웃으며 대하는 진정한 사제지간의 정을 나눌 수는 없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고민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우리나라 학원 스포츠의 구조에 있는 만큼 학원스포츠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요원한 일일 것이다. 학생, 지도자, 학부모, 그리고 학교 당국 등 모두가 스스로 변화를 요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그 시스템 말이다. 지금 이러한 변화의 출발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해 마음을 열고, 잠시만 자신의 이익은 접어두고 학생선수들에게 책과 펜을 돌려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 이 칼럼은 월간 사커뱅크 2015년 11월호에 실렸던 것으로 월간 사커뱅크와 칼럼니스트의 허락 하에 게재되었습니다.

글 = 김현수
사진 = FA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