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이야기

포지션 파괴자, 박진섭

용의꿈 2016. 4. 23. 09:58


포지션 파괴자, 박진섭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좌영표 우진섭’은 한국 축구 대표팀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박진섭은 자신이 선수로서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큰 부상도, 슬럼프도 없던 그의 선수 생활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을까? 박진섭의 축구 인생을 돌아보면 그리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꾀돌이 멀티플레이어의 시작
“현대 축구에서는 멀티플레이어를 많이 원하잖아요. 사실 제가 어릴 때는 멀티플레이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지만, 저는 포지션을 정해놓고 뛴 적이 없어요. 거의 모든 포지션을 다 맡아봤어요. 초등학교 때는 키가 큰 편이어서 골키퍼를 맡았어요.”

박진섭이 서울 중곡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마침 축구부가 창단됐다. 박진섭은 이것이 운 좋은 선수 생활의 시작이라고 했다. 이전부터 동네 형들과의 ‘골목 축구’로 실력을 쌓았던 박진섭은 “이 길이 내 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처음 맡았던 포지션은 골키퍼다. 또래보다 키가 컸던 것이 그 이유였다. 박진섭은 “3개월 정도 했는데, 맨바닥에 넘어지면서 긁히고, 쓸리고 하다 보니 너무 아프더라. 다른 거 하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 드렸다. 필드플레이어가 된 후에도 승부차기 때는 내가 골키퍼를 봤다”고 했다.

필드플레이어로서도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스트라이커부터 미드필더, 중앙 수비수와 측면 수비수에 이르기까지 거의 포지션을 돌아가며 맡았다. 그만큼 다재다능했고, 지도자들은 박진섭의 이 같은 능력을 높이 샀다. 상대나 상황에 따라 박진섭의 포지션을 이동시켰다. 박진섭 역시 이를 즐겼다.

“여러 포지션을 뛰는 것이 재미있었다. 역할이나 매력이 각각 달랐다. 스트라이커로서 골을 넣었을 때의 환희와 기쁨은 더 할 나위가 없다. 미드필더는 공을 많이 만질 수 있고,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수비수는 상대를 막아내고 공을 뺏어내는 데서 기쁨이 있었다.”

박진섭이 멀티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술과 포지션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박진섭은 “동네 축구만 하다 축구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각 포지션의 임무와 형태 유지의 필요성을 처음 느꼈다. 새로운 세계였다”고 말했다. 또래에 비해 습득력이 좋았던 박진섭은 빠르게 전술의 기본기를 익혀나갔다. 프로 시절, 지능적인 플레이로 ‘꾀돌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노력의 성과였다.

박진섭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느끼기 시작한 것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격 조건과 체력, 지구력 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몸으로 대결하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으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많이 했고, 그 답이 머리로 하는 축구, 생각하는 축구였다”고 말했다. 많은 고민과 노력 끝에 얻어낸 박진섭만의 경쟁력이었다.

‘쿠칭 쇼크’의 기억
“세상은 넓다는 것을 알게 됐죠. 부족한 점도 많이 알게 됐고요. 청소년 대표 때만 이야기해도 책 몇 권은 나올 거예요.”

1997년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열린 FIFA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현 FIFA U-20 월드컵)는 박진섭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당시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1996년 AFC U-19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박진섭을 비롯해 이관우, 안효연, 김도균, 심재원, 양현정 등 멤버도 좋았다. 하지만 성적은 기대를 한참 밑돌았다.

한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 브라질과 함께 ‘죽음의 조’에 속해 3경기에서 1무 2패를 거뒀고, 조 최하위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남아공과의 1차전에서 0-0으로 비긴 것도 아쉬운 결과였지만, 이후 프랑스에 당한 2-4 패배, 브라질에 당한 3-10 대패는 굴욕을 넘어 참사라는 표현을 들었다. 박진섭은 “프랑스, 브라질은 확실히 수준이 달랐다. 기술적인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진섭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인 게 있었다. 프랑스전에서 넣은 2골이었다. 프랑스전에서도 박진섭은 공격과 수비를 오갔다. 수비수로 선발 출전했다가 후반전에는 스트라이커로 나섰다. 후반 9분 첫 골을 성공시켰고, 후반 23분에는 페널티킥을 얻어내 직접 마무리했다. 박진섭의 만회골 덕분에 한국은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진섭은 수비수로서 막지 못했던 당시의 프랑스 청소년 대표팀 공격수 티에리 앙리를 떠올렸다. 박진섭은 “다른 건 기억 안 나도 앙리는 기억한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웃었다.

박진섭은 울산에서 3년 6개월을 뛰며 두 번의 K리그 준우승(2002년, 2003년)을 차지했고, 성남 일화로 이적한 후에는 2006년에 선수 생활 중

처음으로 K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국가대표 발탁, 그리고 군 입대
“성인 대표팀에 처음 선발됐을 때는 미드필더였는데, 오른쪽 풀백이었던 최성용 선배가 부상을 당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 서게 됐죠. 저야 어느 자리든 감사한 마음으로 뛸 수 밖에요. 무슨 정신으로 뛰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큰 실수 없이 잘한 것 같아요. 골도 넣었고요.”

청소년 대표팀에서 두각을 나타낸 박진섭은 1998년 11월에 첫 성인 대표팀 경기를 소화했다. 데뷔전은 공식 A매치가 아닌 카리브해 올스타팀과의 친선전이었다. 오른쪽 풀백으로 나선 박진섭은 전반 34분 통쾌한 중거리슛으로 쐐기골을 성공시켰다. 화려한 데뷔전이었다. 당시 고려대 재학 중이던 박진섭은 이후 부동의 오른쪽 풀백으로 자리했고, 올림픽 대표팀과 성인 대표팀을 오가며 활약을 펼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전후로는 ‘좌영표-우진섭’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

한창 주목을 받던 시기에 박진섭은 군 입대를 결정했다. 드래프트 신청 접수 마지막 날까지 상무 입대 서류와 드래프트 서류를 놓고 고민을 하다 결국 상무를 택했다. 박진섭은 “군대는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던 때인데, 군 면제 혜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당연히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진섭은 드래프트를 통해 원치 않는 팀에 가는 것 보다는 빨리 군대에 다녀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결국 고려대를 졸업하자마자 2000년 상무에 입대해 2002년 제대했다.

결과적으로 상무 입대는 거스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박진섭을 대표팀에서 멀어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진섭은 “내 선택에 후회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박진섭은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일”이라면서도 “입대 후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곧장 대표팀에 들어갔는데, 나 스스로 준비가 안 돼있다고 느꼈다.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다른 선수들이 잘했기 때문에 내가 선택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K리그와 내셔널리그를 섭렵한 선수
“운동하면서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좋은 팀을 만나고, 좋은 선수들을 만나서 우승도 했고요. 가장 좋았던 것은 큰 부상도, 슬럼프도 없었다는 거죠. 축복받은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축구는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동료가 잘하고 동료가 잘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거든요. 앞으로 나서기보다 뒤에서 내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잘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군 생활을 마친 박진섭은 2002년 자유계약으로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드래프트가 폐지되고 자유선발제도가 실시된 첫해였다. 박진섭은 이 역시 행운이었다며 웃었다. 박진섭은 울산에서 3년 6개월을 뛰며 두 번의 K리그 준우승(2002년, 2003년)을 차지했다. 성남 일화로 이적한 후에는 2006년에 선수 생활 중 처음으로 K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박진섭은 당시를 “감독님과 선수들 간의 분위기도 좋아서 경기도, 생활도 재미있게 했다. 과정부터 결과까지 완벽했던 시즌”이라고 기억했다. 화려하고 성공적인 프로 생활을 했지만, 박진섭은 그 모두를 “팀과 동료를 잘 만난 덕”이라고 했다. 박진섭은 스스로를 “앞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도와주는 것이 편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박진섭은 부산 아이파크에서의 2년을 마지막으로 2010년 은퇴를 결정했다. 상무 입대 때부터 생각한 “10년만 버티자”는 계획을 딱 맞춰 지켜냈다. 어려서부터 느낀 부족한 체력 때문에 더 오랜 선수 생활은 꿈꾸지 않았다. 박진섭은 “막상 그만두려고 하니 아쉽긴 하더라. 다른 팀을 알아보기도 했는데 결국 잘 안 됐다. 계획했던 만큼 다했으니 미련 없이 끝내기로 했다. 지도자로서의 꿈을 위해 빨리 준비해야겠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1년 여름 내셔널리그의 울산현대미포조선에 입단한 것은 대학 시절 은사인 조민국 현 청주대 감독과의 의리 때문이었다. 박진섭은 울산현대미포조선의 플레잉코치로 합류해 2011년 내셔널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프로 축구 최상위 리그인 K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린 후, 실업축구 최상위리그인 내셔널리그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다. 흔치 않은 이력을 마지막으로 선수 박진섭과 지도자 박진섭이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박진섭은 선수로서의 자신이 “공 좀 찰 줄 알던 선수”로 기억되길 바랐다. 이력에 비해 소박한 바람이었다.

2016년 현재 박진섭은 최진철 감독과 함께 포항 스틸러스에 코치로 재직 중이다.


여전히 운동장이 즐겁다
“축구가 지겨운 적이 없어요. 운동장에 나가면 항상 즐거워요. 선수들이랑 같이 땀 흘리면서 배우는 게 많거든요.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선수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많이 알려고 해요. 지도자로서의 제 철학을 쌓아가는 데는 그만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박진섭은 2013년 부산 아이파크 유스 팀인 개성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했고, 그해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박진섭은 또 한 번 “선수 구성이 좋았던 덕”이라며 자신의 행운을 이야기 했다. 자신의 역할은 뒤에서 선수들이 잘 뛸 수 있게 도와준 것뿐이라고 했다. 지난해 시즌 중반 갑작스레 부산의 코치를 맡은 것은 어땠을까? 처음으로 맡은 프로 팀이었지만 시작부터 고됐다. 박진섭은 부산이 성적 부진과 감독 교체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코치로 부임했고, 결국 팀의 강등을 함께했다. 박진섭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시즌 중간에 들어간 것이었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결국 강등을 피하지 못했다. 승강플레이오프 2차전이 끝나고 눈물이 흘렀다”고 말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박진섭은 올 시즌을 앞두고 포항 스틸러스로 자리를 옮겼다. 선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최진철 감독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박진섭은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해서 그런지 계속 바닷가 팀들로 오게 된다”며 웃었다.

박진섭은 지도자로서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단계다. 선수들과 소통하고 선수들을 다루는 면에서 남다른 장점을 갖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박진섭의 목표다. 박진섭은 “전에는 ‘몇 살 정도에 감독이 돼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보다는 얼마나 잘 준비가 돼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 스스로 준비가 됐다고 느꼈을 때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4월호 'Profile'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권태정
사진=FA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