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이야기

[스포츠인권 칼럼 4] 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담겨있을까?

용의꿈 2016. 6. 8. 17:22

[스포츠인권 칼럼 4] 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담겨있을까?


사랑의 매로 맺어진 사제의 정

과거 학교 스포츠 현장에서 운동부 지도자는 학생선수의 경기력 향상을 도모하는 전문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함께 요구받아 왔다. 운동선수를 육성하는 장소가 학교다 보니 때로는 코치로, 때로는 교사로서의 역할이 함께 요구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많은 운동부지도자들은 코치로서의 전문가적 역량보다는 교사로서의 교육자적 역량에 집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교육자로서의 지도자는 학생선수들에게 필요이상의 많은 시간과 열정을 할애하면서 그 속에서 성과와 보람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이런 노력들은 곧 보람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어 자신을 찾아주는 제자들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자신의 그늘 아래서 운동을 할 때 다그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면서 지내온 시간들이 미안하기는 하지만 성공한 제자가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준 것을 보면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고, 늘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노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사랑의 매는 훌륭한 교육적 수단이었다.

유교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 교육에서 체벌은 훈육을 위해 스승이 제자에게 종아리를 내어주며 고통을 감내하기도 하고, 제자가 잘되라는 깊은 마음에서 기꺼이 매를 들어 훈육하는 장면은 교육자들의 진심어린 교육 현장을 보여주는 미담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교육부도 「체벌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을 마련하여 “체벌은 원칙적으로는 지양하지만 교육상 불가피할 때에는 학생에게 매 또는 그 외의 신체적 고통(이하 기합이라 한다)을 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른바 ‘사랑의 매’라는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매’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와 같이 때때로 그 의미가 퇴색되거나 사회통념을 벗어난 폭력의 수준으로 가해지기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개는 기성세대들에게 학창시절, 사제 간의 정을 나누었던 소중한 추억으로 회자되면서 성공을 향한 성장통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지도자 자신도 운동하면서 이미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들도 폭력이 아닌 ‘사랑의 매’로 잘 다스린다면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우리나라 훈련 문화에서 체벌은 필수불가결한 훈련방법의 일환으로 인식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교육자들도 헷갈린다.

교육자들에게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첨예한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체벌은 불가피하다는 견해와 체벌은 전면 금지되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과거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도 ‘학교문화 선진화 방안’에서 체벌에 대해 직접체벌과 간접체벌로 나누면서 간접체벌은 일부 허용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때 직접체벌은 신체나 도구를 이용해 반복적, 지속적으로 신체에 고통을 주거나 학생의 인격을 손상하는 지도방법을 의미하며, 간접체벌은 교실 뒤에 서 있기, 운동장 걷기, 팔굽혀 펴기와 같은 훈육, 훈계 수준의 교육적 벌이라고 정의했다.

최근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교권보호와 관련해 실시한 조사에서 가장 실효적인 교권침해 예방조치로 ‘체벌은 금지하되 교사가 문제행동 학생을 훈육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명확히 마련(47.7%)’을 꼽았다. 이를 풀어보면 문제 학생에 대한 직접체벌은 금지하되 훈육, 이른바 간접체벌은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호해 달라는 말이다.

쉽게 이 문제가 이해되는 듯 하지만 체벌과 훈육의 경계는 무엇인지, 문제행동 학생은 어떤 학생인지, 또 이것은 누가 판단하는지, 그리고 어떤 경우 이것이 정당화되는지도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사랑의 매에서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와 ‘매’의 기준을 인위적으로 정해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교육자가 되려하지 말고, 코치가 되자!

과거 체육교사들의 상당수가 편하게 운동장에 공하나 던져주면서 “축구해라~!”말하고 홀연히 사라지던, 이른바 아나공 수업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때 체육교사들의 주 임무는 교문 생활지도나 교내 환경정리 감독 등과 같은 고유 업무 외의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기 과목은 대충하고, 어쭙잖은 인성교육에 매진하게 된 것인데 이 때 문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체벌은 모두 체육교사들의 몫이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수업을 대충하는 체육교사의 ‘비전문성’을 들어서 없어지거나 축소되어야 할 수업으로 체육을 꼽았다. 이는 곧 ‘학교체육의 위기’로까지 불리며 선택과목으로의 전락은 물론 시수 대폭삭감이라는 칼바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근 학교체육을 통한 학교폭력예방과 인성발달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일선 체육교사들이 전문적 체육수업을 실시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나 우리는 그 위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학교 운동부 지도자들이 교육자인가, 코치인가, 이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짚어보자. 운동부 지도자들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이상 자신들의 정체성이 교육자인지, 코치인지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과거와 같이 지도자들이 교육자라고 믿는다면 자신이 담당하는 학생선수들의 운동기술 향상은 물론 생활면에 이르기까지 전인교육의 목적에 부합하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반면 지도자의 역할이 코치의 역할로 제한된다면 운동부 지도자는 고도의 전문적인 훈련지식을 동원하여 학생선수의 인성 문제보다는 운동능력의 향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기량향상을 위한 체벌은 훈육자가 아니므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선수의 인성문제를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방법과 기준을 달리하여 스포츠 자체에 내재된 교육적 요소들을 통해 인성교육을 도모하는 전문가적 자질의 발휘가 요구된다. 전문성에 있어서만큼은 코치의 역할이 교육자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 또한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변화된 시대, 지도자의 변화가 요구된다.

온 학교의 체벌을 담당하던 체육교사가 비전문가로 낙인찍히던 그 위기상황처럼 운동부의 지도자들도 가르칠게 없으니 때린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너무 편협한 생각일까?

현대사회에서 사랑의 매에는 더 이상 사랑이 담기지 않는다. 과거에는 분명 아니었을 테지만 작금의 ‘매’는 제 아무리 사랑을 담고자 해도 담기지 않는 그릇이다. 더 이상의 체벌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네 인권환경에서 일선 운동부 지도자들은 체벌이 더 이상 훈련 방법의 일환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체벌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지도자들은 더 이상 교육자로 남고자 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탁월한 전문성으로 무장한 코치가 되어야만 운동부 지도자들의 역할을 찾고, 사회의 인정을 얻어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의외로 명확하다. 작년 캐나다에서 40대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된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는 왜 내각을 남녀동수로 구성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고 답했다. 우리 스포츠 현장은 무려 2016년이라는 것이 바로 그 이유가 될 것이다.

글 = 김현수
사진 = FA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