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이야기

고정운, 피나는 노력으로 ‘적토마’를 만들다

용의꿈 2016. 2. 23. 11:44

고정운,피나는 노력으로 ‘적토마’를 만들다


중국 삼국 시대 관운장이 탔다는 명마, 적토마. 19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고정운의 플레이는 흡사 그 적토마와 같았다. 폭발적인 드리블과 돌파. 보는 이의 기분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그의 플레이는 그 시대 한국 축구를 사랑하던 팬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그런데 그의 모든 것들이 천부적인 재능이라기보다는 노력의 산물이라면 믿어지는가? 그의 축구 인생을 들어보자.

우상 차범근의 몸으로 ‘인체 개조’

“줄넘기, 튜브, 웨이트를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어요. 그랬더니 2년 만에 14kg이 찐 거야. 체격이 얼마나 좋아졌냐 하면 학교에서 유니폼과 트레이닝복을 다시 맞춰줬고, 다른 팀 선수들은 날 몰라볼 정도였다니까. 그게 건국대의 전설로 남았어요. 건대 후배 황선홍 감독이 내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자라더니 자기 자서전에 내 이야기를 세 장이나 썼더라고.”

전라북도 완주군, 지금 우석대학교가 있는 자리는 40년 전엔 논과 밭뿐이었다. 그곳이 어린 고정운의 놀이터였다. 축구공이 귀하던 시절이라 축구공을 대신한 고무공이 그의 발을 떠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쉬는 시간에도 틈만 나면 친구들과 함께 공을 찼다. 삼례 중앙국민학교에 다니던 고정운은 축구부가 있던 근처 학교인 삼례국민학교를 상대로 맹활약했다. 유니폼도 없어 러닝셔츠에 백넘버를 써서 경기를 했을 정도로 빈곤했지만 실력은 고정운을 가진 중앙국민학교가 나았다. 중앙국민학교 축구부는 고정운을 부원으로 스카우트했다. 축구선수의 인생이 시작됐다. 그리고 정읍 호남중, 이리동중, 전주 해성중, 이리고 등을 거쳐 비교적 약체였던 건국대에 입학했다. 축구 명문이 아닌 건국대를 고른 건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고정운은 지금도 이 선택이 현명했다고 자부한다. 1학년 때부터 경기를 소화하며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정운을 얻은 건국대는 연세대, 고려대에도 지지 않는 강호로 성장했다. 고정운은 건국대 시절 ‘인체 개조’를 통해 한층 성장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적토마’라는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수였다고 회고한다. 대학 입학 당시 체중은 63kg에 불과했다. 속도, 힘, 지구력 모두 특별하지 못했고 다만 뛰어난 기술로 인정받는 선수였다. 성인 축구에 가까운 대학 무대에서 신체적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던 제일은행 축구장에서 육군사관학교와 수중전이 열렸을 때, 고정운은 상대 수비수의 어깨에 밀려 넘어진 뒤 데굴데굴 굴러 하수구에 “처박혔다.” 그리고 두 번째 경기부터 선발 출장이 불투명해졌다. 입학과 동시에 주전이 될 줄 알았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살을 찌워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갖게 된 고정운은 야구부원들에게 배운 살찌는 비법대로 하루에 맥주 한 캔 마시기, 초콜릿 먹기, 라면 먹기 등 여러 방법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답은 운동이었다. 2학년 때부터 웨이트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3학년 때 체중이 14kg이나 불어나 우리가 잘 아는 그 고정운이 됐다. 흔히 살을 찌우면 속도가 느려진다고 하지만 그는 반대였다. 허벅지, 종아리, 발목 근육이 강화되자 폭발력과 지구력이 모두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차범근의 선수 시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것이 유럽 선수들보다 오히려 뛰어났던 신체적 능력이다. 고정운은 무수한 노력으로 자신의 우상과 비슷한 몸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고정운은 프로 시절 상대 팀 감독으로 맞붙었던 차범근이 자신을 유독 높게 쳤다고 돌아본다. 20대 초반에 체격과 함께 플레이스타일까지 바꾼 일화는 비슷한 나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근육을 불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우리 집 식구 중에서 키가 170cm 넘는 사람이 없고 몸무게도 70kg 넘는 사람이 없어요. 줄넘기, 튜브, 웨이트로 내 몸을 내가 만든 거지.”

일화의 첫 간판 스타

“그때 일화에 박종환이란 카리스마 있는 감독이 있었잖아요. 운동을 너무 많이 했어요. 정말로. 창단 멤버로 40명이 모였는데 그중 11명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 심리, 라이벌 의식이 굉장히 강했다고. 동계훈련 때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눈이 발목까지 쌓인 삼척 운동장을 무조건 20바퀴 도는 거야. 하루에 운동 네 탕. 그런데 저는 운동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어요.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 전 천부적인 재능도 없고,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배운 것도 아니고, 시골에서 대기만성형으로 성장한 선수예요. 노력 없인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런 경쟁은 자신 있었지.”

고정운은 1989년 일화 천마의 창단 멤버로 들어가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수원 삼성 등 다른 K리그 팀도 마찬가지였는데, 창단 첫 해 주어지는 우선지명권을 통해 유망한 신인들을 싹쓸이하고 그 저력으로 일정 수준까지 전력을 향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일화도 고정운과 함께 공격을 맡은 김이주, 중학교부터 고정운과 동창인 유승관 등을 호남 우선지명으로 선발하고 주전급 기량을 지닌 수비수 임종헌을 1지명으로 데려가는 등 여러 신인으로 전력을 보강했다. 박종환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엄청난 운동량을 소화해야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 고정운에겐 오히려 유리한 상황이었다. 스스로 자기 몸을 바꾼 경험은 어떤 훈련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신인이 선배 선수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기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한국 축구는 어린 선수에게 바로 기회를 주기보다 선배들을 우대하는 편이었다. 대학 시절 고정운과 함께 최고 윙어 칭호를 놓고 다퉜던 한양대 출신 심봉섭(대우 로얄즈), 연세대 출신 김봉길(유공 코끼리)이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23~24경기 출장에 그친 것에 비하면 고정운이 주전으로 31경기에 뛴 건 분명 유리했다. 고정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4골 8도움으로 그해 도움 2위에 오르며 신인왕이 될 자격을 증명했다. 동시에 신생 팀 일화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 잡아갔다. 고정운에겐 ‘대표선수 프리미엄’도 있었다. K리그에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5월, 싱가포르를 상대로 벌어진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전에서 첫 경기를 뛰었다. 그는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청소년 대표 경력이 없는 그에게 태극마크는 유독 낯설고 설레는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전국체전에 참가했던 고정운은 대학부 경기 볼보이를 하다가 당대의 스타 정해원이 벗어놓고 간 스타킹을 주워 1989년 당시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그 정해원과 한 경기장에서 뛴다는 건 벅찬 경험이었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고정운은 자신의 실력은 부족하지 않았으나 선배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이회택 감독의 성향 때문에 최종 명단에서 탈락했다고 회고한다. 대신 4강까지 진출한 1990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대표선수로서 데뷔골을 넣었다. 고정운은 1990년 4골 3도움, 1991년 13골 7도움, 1992년 7골 4도움을 기록하며 순조롭게 프로 경력을 지속해나갔다. 특히 1991년의 13골은 프로 경력을 통틀어 가장 많은 득점이다. 원래 포지션은 윙어지만 1991년에는 공격수에 가깝게 활약했고, 그해 K리그 베스트 11 공격수 부문에 선정됐다. 1993년엔 첫 우승을 경험했다. 폭발적인 플레이스타일과 일화의 마스코트 천마의 이미지가 결합된 적토마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선수가 고정운

“레버쿠젠에 갔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달랐겠죠”

“1994년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왔지. 월드컵을 잘 끝내고 와서 K리그 우승하고 MVP까지 받았던 건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은 독일에 못 가게 된 거죠. 그때 실망을 되게 많이 했지.”

4년 전 무산된 월드컵 본선 무대 출전의 꿈이 1994년 다시 찾아왔다. 고정운은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다.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대회 중 가장 경기 내용이 좋았던 걸로 평가되는 ‘김호 사단’에서 고정운은 조별리그 세 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활약했다. 특히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선 상대 수비수 나달을 전반 25분 만에 퇴장시켰다. 무더위와 이동 거리 때문에 대회 전체가 체력전 양상으로 전개됐지만, 고정운은 90분 내내 전력질주를 반복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버리지 않았다. 엄청난 활동량의 비밀은 김호 감독이 준 산삼이었다.

“원래 산삼이나 한약의 효능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효과를 본 적도 없었는데, 그땐 감독님이 주신 산삼을 먹고 잠을 너무 잘 잤어요. 제가 예민한 성격이거든요. 월드컵 기간 내내 컨디션 조절이 잘 됐죠. 산삼을 먹으면 졸리다는데 그런 효과를 봤나.” 월드컵에 참가하느라 K리그 출장 횟수가 21회에 불과했지만 고정운은 4골 10도움의 놀라운 성적을 남겼고, 일화 우승과 함께 MVP에 선정됐다. 영광의 나날이었다. 이때 유럽 진출 기회가 찾아왔다. 월드컵 본선 활약상을 눈여겨 본 바이엘04 레버쿠젠이 고정운 영입을 추진했다. 뜬소문이 아니라 전 레버쿠젠 선수인 차범근(당시 울산 현대 감독)을 통해온 공식 제의였다.

고정운은 일화가 우승 선물로 제공한 부부 동반 유럽 여행길에서 겸사겸사 독일을 찾아 이적 협상까지 진행했다. 고정운의 기억으로는 이적료가 한화 3억 원 정도, 연봉이 1억 5천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박규남 일화 단장이 이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선수 마음대로 팀을 고른다는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이었다. 고정운은 엄청난 아쉬움을 안고 일화에 잔류해야 했다. 고정운을 붙잡은 일화는 이듬해까지 K리그에서 우승하며 기록적인 3연패를 달성한다. 1995년에도 고정운은 최고 스타로서 시즌 베스트 11에 팀 후배 신태용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1996년에는 어깨와 종아리 등의 부상으로 K리그에서 부진했던 대신 아시아슈퍼컵을 거머쥐었고, 아프리카 챔피언 올랜도 파이러츠(남아프리카공화국)와 치른 아프로-아시안 클럽선수권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두 번째 해외 진출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 세레소 오사카 강화부장이 일화의 경기를 관전한 뒤 이적 제의를 했다. 당시 보도(한겨레)에 따르면, 이적료 8억 원, 연봉 5억 6천만 원에 달하는 계약이었다. 1995년 고정운과 홍명보가 K리그 첫 역대 연봉을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향상된 액수였다. 고정운 스스로도 “그땐 솔직히 돈을 보고 간 거죠. 한국에서 9년 동안 뛰었는데도 그동안 모은 액수가 일본에서 1년 번 돈에도 미치지 못했으니까. 외국을 가지 않으면 K리그 선수가 집 한 채 사기 힘들었지”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고정운은 K리그 스타가 J리그로 진출하는 첫 사례를 만들었다. 그의 뒤를 이어 홍명보, 하석주, 김도훈, 황선홍 등이 일본에서 뛰게 된다.

일본에서 보낸 1년 반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일단 한국보다 먼저 도입된 J리그의 양잔디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푹신한 잔디에서 공이 생각대로 구르지 않았고, 드리블을 하다보면 공보다 몸이 앞서기 일쑤였다. 수개월에 거쳐 적응을 마친 뒤엔 외국인 선수에 대한 높은 기대가 압박감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잦은 대표팀 차출도 해외 적응에 방해가 됐다. “그때 용병에 대한 압박이 컸거든. 다른 팀에는 둥가,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이 뛰던 시절이니까. 게다가 우리 팀 감독도 브라질 사람, 나를 제외한 용병들도 다들 브라질 사람이라 좀 힘든 건 있었어요.”

도쿄대첩과 ‘차범근-고정운 불화설’

“그게 실수였을까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제게 질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제가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늘 열심히 뛰는 선수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어쨌든 정원이, 민성이가 골 넣어서 이긴 경기고. 팬들은 저를 욕하지 않는데, 코칭스태프는 무겁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서 힘들었지. 차범근 감독은…모르겠어. 나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셨다고 해야겠지.”

일본 진출 첫해, 고정운은 코리아컵, 브라질과의 친선경기,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등 A매치 11경기를 소화했다. 그중 9월에 열린 최종예선 경기에서 사건이 터졌다. 일명 도쿄대첩이었다. 경기 종료를 7분 남기고 서정원과 이민성의 연속골이 터져 2-1 역전승을 거둔 그 경기에서 한국이 궁지에 몰리는 데에는 고정운이 한몫 했다. 일본의 공을 잘 빼앗고도 머뭇거리다 다시 소유권을 내줬고, 이어진 상황에서 야마구치에게 선제골을 내줬기 때문이다. 10월 카자흐스탄 원정에서 불화설이 시작됐다. 원정 비행기 안에서 차 감독이 고정운을 불러 “선발로 나갈 거니까 준비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경기를 앞둔 당일 미팅에선 고정운이 제외됐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1-1 무승부에 그쳤고, 일주일 뒤 열린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선 고정운이 투입돼 1골을 넣어 5-1 대승에 일조했다.

단순한 체력 안배로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야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카자흐스탄전이 끝난 뒤 고정운을 뺀 이유가 화두에 올랐고, 차 감독은 “컨디션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지만 이후 고정운의 훈련이나 우즈벡전 활약엔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정운은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한일전 실수를 보고 내 컨디션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때 내가 제일 고참에 속했으니까”라고 돌아봤다. 예선에서 그의 활약상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오른쪽 윙어는 이상윤이 대체했다. 그해 11월 홈에서 일본에 0-2로 패배한 최종예선 7차전을 끝으로 고정운은 더 이상 A매치에 불려가지 못했다. 그가 경험한 월드컵 예선은 세 번이었지만 본선은 한 번뿐이었다.

1998년 8월, 고정운은 짧은 일본 생활을 마치고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한다. 국내 복귀를 타진하며 정든 일화를 먼저 고려했지만 연봉에서 이견이 있었다. 같은 시기 황선홍이 포항을 떠나 세레소로 향했다. 별개의 이적이었지만 포지션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사실상 고정운에 이적료를 더한 트레이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황선홍은 고정운에게 “동국이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을 거예요”라는 말을 남겼고, 정말로 포항 경기장과 숙소 주변에는 이동국의 팬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혼을 빼놓았다. 당시 포항에서 이동국 못지않은 화젯거리가 고정운의 최초 40-40 달성 여부였다.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의 기록은 41골 37도움이었기 때문에 3도움만 추가하면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울산 현대의 김현석과 경쟁하듯 기록을 쌓아가던 고정운은 김현석이 부상당한 시기에 차곡차곡 기록을 추가해 9월 5일 전남 드래곤즈를 상대로 가장 먼저 기록에 도달했다.

1999년 교통사고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한 뒤 하락세를 맞은 고정운은 2001년 4경기만 뛴 뒤 8월 5일 올스타전을 끝으로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스타 후배들이 고정운의 은퇴를 기리기 위해 일부러 모인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고정운은 지금도 은퇴하는 순간만은 자신이 가장 복받은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한국 축구에 자신보다 더 이바지한 선수들의 은퇴식이 A매치 하프타임에 너무 조촐하게 진행되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공식매거진 <ONSIDE> 2월호 'PROFILE'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김정용(풋볼리스트)
사진=FA 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