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야생의 속도광
한때 ‘쌕쌕이’로 불렸던 축구선수가 있었다. 정재권. 한국 축구의 빠른 속도를 상징하는 또 한 명의 선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주력밖에 없었다. 고민을 거듭했던 정재권이 선택한 생존법은 장점의 극대화였다.
감출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축구선수
“밀림에서 길러진 소년에게 갑자기 옷을 입으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딱 그런 상태였어요. 시골에서 천방지축으로 놀던 애가 도시로 오니까 모든 게 구속으로 느껴졌죠. 아버지가 저를 축구부에 넣은 건 단체생활을 통해 순서와 배려를 배우라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축구를 시작했죠.”
공을 적당한 거리에 툭 차 놓고 속도를 붙여 뛰기 시작하면 별다른 기술 없이 수비수를 제칠 수 있었다. 정재권의 전성기 시절 플레이다. 그의 달리기 실력은 야생에서, 즉 시골 들판을 뛰어 놀며 연마한 것이었다. 축구선수 중엔 육상부 출신도 많지만, 정재권은 육상부 선수보다 빠른 달리기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선수가 될 생각이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대도시 부산의 삶은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정재권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자 축구부에 집어넣는 것으로 훈육을 대신했다.
어린 정재권은 축구에 대한 사랑이나 목표 의식이 희박했다. 대신 재능이 있었다. “넌 공을 다룰 줄 모르니까 무조건 공을 쫓아가서 걷어내라”라는 지시를 받고 리베로로 축구부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점차 포지션이 앞으로 전진해 3학년 때는 센터포워드가 됐다. 제법 선수다워진 정재권은 부산상고 진학 이후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교 3학년 때 청소년대표로 차출된 건 정재권의 첫 시련이었다. 그는 서정원, 노정윤, 이임생 등 쟁쟁한 또래 선수들 사이에서 후보로 밀렸다. “제가 도 대표 정도였다면 거긴 전국 대표가 모인 팀이었죠.” 카타르에서 열린 U-19 아시아선수권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충격에 빠진 정재권은 동료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마사지 받는 동안 혼자 수영을 했다. 들키지 않고 울기 위해서였다. 그때 처음 선수라는 자의식이 생겼고, 한양대로 진학하면서 제대로 축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픔이 정재권의 성장을 이끌어냈다.
다른 엘리트 선수들보다 늦게 축구를 배운 편이지만, 비범한 스피드를 활용하는 법부터 스스로 갈고 닦았기에 대표급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정재권은 공을 다루는 요령이 부족했다. 주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그의 고민거리였다. 답은 끝없는 훈련과 연구였다. 사이드라인 밖으로 공을 차버린 적도 많았지만 그런 실수는 세금 같은 것이었다. 다양한 거리와 각도로 치고 달리는 플레이를 반복하다 보니 거리 조절 요령이 생겼다. “실패를 통해 배운 거죠.”
감출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축구선수
“밀림에서 길러진 소년에게 갑자기 옷을 입으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딱 그런 상태였어요. 시골에서 천방지축으로 놀던 애가 도시로 오니까 모든 게 구속으로 느껴졌죠. 아버지가 저를 축구부에 넣은 건 단체생활을 통해 순서와 배려를 배우라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축구를 시작했죠.”
공을 적당한 거리에 툭 차 놓고 속도를 붙여 뛰기 시작하면 별다른 기술 없이 수비수를 제칠 수 있었다. 정재권의 전성기 시절 플레이다. 그의 달리기 실력은 야생에서, 즉 시골 들판을 뛰어 놀며 연마한 것이었다. 축구선수 중엔 육상부 출신도 많지만, 정재권은 육상부 선수보다 빠른 달리기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선수가 될 생각이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대도시 부산의 삶은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정재권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자 축구부에 집어넣는 것으로 훈육을 대신했다.
어린 정재권은 축구에 대한 사랑이나 목표 의식이 희박했다. 대신 재능이 있었다. “넌 공을 다룰 줄 모르니까 무조건 공을 쫓아가서 걷어내라”라는 지시를 받고 리베로로 축구부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점차 포지션이 앞으로 전진해 3학년 때는 센터포워드가 됐다. 제법 선수다워진 정재권은 부산상고 진학 이후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교 3학년 때 청소년대표로 차출된 건 정재권의 첫 시련이었다. 그는 서정원, 노정윤, 이임생 등 쟁쟁한 또래 선수들 사이에서 후보로 밀렸다. “제가 도 대표 정도였다면 거긴 전국 대표가 모인 팀이었죠.” 카타르에서 열린 U-19 아시아선수권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충격에 빠진 정재권은 동료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마사지 받는 동안 혼자 수영을 했다. 들키지 않고 울기 위해서였다. 그때 처음 선수라는 자의식이 생겼고, 한양대로 진학하면서 제대로 축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픔이 정재권의 성장을 이끌어냈다.
다른 엘리트 선수들보다 늦게 축구를 배운 편이지만, 비범한 스피드를 활용하는 법부터 스스로 갈고 닦았기에 대표급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정재권은 공을 다루는 요령이 부족했다. 주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그의 고민거리였다. 답은 끝없는 훈련과 연구였다. 사이드라인 밖으로 공을 차버린 적도 많았지만 그런 실수는 세금 같은 것이었다. 다양한 거리와 각도로 치고 달리는 플레이를 반복하다 보니 거리 조절 요령이 생겼다. “실패를 통해 배운 거죠.”
정재권은 당시 최고의 팀 대우 로얄즈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축구에 빠지지 말고 가족과 대화하라
“축구가 주는 스트레스에 빠져 살다 보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알아볼 수 없어요. 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족을 찌르는 창이 되는 거예요. 저를 걱정하는 가족, 저를 격려하는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죠. 모든 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뒤엔 사고방식을 반대로 바꿨어요. 스트레스를 받을 땐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자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뒤로 제 페이스가 정상으로 돌아왔죠.”
청소년 대표가 된 이후 정재권의 대표팀 경력은 1991 셰필드 유니버시아드 대회 우승,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에서의 선전으로 순탄하게 이어졌다. 올림픽 대표에 처음 선발될 때만 해도 정재권은 스타 반열에 들지 못했으나 작고한 배기면 감독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선발되기 시작했고, 예선전이 진행되며 점차 팀 내 비중이 늘었다. 본선 조별리그 통과에는 실패했으나 3무승부로 선전했다. 모로코전에서 나승화의 크로스를 하프발리슛으로 연결한 순간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재생되는 인생의 명장면이다.
그러나 A대표 경력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1992년 다이너스티컵 멤버로 뽑혀 데뷔전부터 2경기 연속골을 넣은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1994 미국 월드컵 예선전이 시작되자 입지가 좁아졌다. 1993년 5월 레바논 원정에서 경기 종료 1분 전 교체 투입(공식 기록은 정재권이 투입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지만 정재권은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돼 공을 한 번도 못 잡고 경기장을 떠났다. 당시 받은 충격이 컸다. 술이나 담배로 풀 수도 없는 운동선수인지라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정재권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후배 선수들에게 “일상을 회복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축구를 잊고 일부러 추억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와 마주앉아 첫 아이가 태어나던 때 이야기를 되새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즈음 정재권은 프로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1993년 드래프트 제도에 따라 정해진 팀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정재권은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 팀 중소기업은행에서 1년 동안 생활했다. 이듬해 드래프트를 통해 그토록 원하던 대우 로얄즈에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대우는 최고 명문 팀이었다. 정재권은 중학생 때 관전한 대우 경기에서 선발 멤버 11명이 모두 대표급인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우만 고집한 것도 그래서였다.
대우에서 보낸 다섯 시즌은 정재권의 축구 인생 황금기라 할 만하다. 특히 1997년 3관왕(정규리그,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을 차지한 대우는 K리그 사상 가장 강한 팀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후보다. 정재권은 “그땐 원체 멤버가 좋았죠. 이틀 밤새고 경기해도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라고 했다.
최고의 순간은 1998년 8월이었다. 그땐 정규리그에도 연장전과 골든골 제도가 있었다. “LG를 상대로 0-1로 지고 있다가 제가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서 역전까지 만들었어요. 골든골 넣고 윗옷을 집어 던진 저에게 팬들이 다 내려와서 무등을 태워 줬어요. 그대로 운동장을 돌았어요. 모든 게 좋았죠. 날아갈 것 같았고. 그 많은 팬들이 내려와서 본인 일처럼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뭉클했어요.”
“축구가 주는 스트레스에 빠져 살다 보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알아볼 수 없어요. 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족을 찌르는 창이 되는 거예요. 저를 걱정하는 가족, 저를 격려하는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죠. 모든 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뒤엔 사고방식을 반대로 바꿨어요. 스트레스를 받을 땐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자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뒤로 제 페이스가 정상으로 돌아왔죠.”
청소년 대표가 된 이후 정재권의 대표팀 경력은 1991 셰필드 유니버시아드 대회 우승,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에서의 선전으로 순탄하게 이어졌다. 올림픽 대표에 처음 선발될 때만 해도 정재권은 스타 반열에 들지 못했으나 작고한 배기면 감독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선발되기 시작했고, 예선전이 진행되며 점차 팀 내 비중이 늘었다. 본선 조별리그 통과에는 실패했으나 3무승부로 선전했다. 모로코전에서 나승화의 크로스를 하프발리슛으로 연결한 순간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재생되는 인생의 명장면이다.
그러나 A대표 경력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1992년 다이너스티컵 멤버로 뽑혀 데뷔전부터 2경기 연속골을 넣은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1994 미국 월드컵 예선전이 시작되자 입지가 좁아졌다. 1993년 5월 레바논 원정에서 경기 종료 1분 전 교체 투입(공식 기록은 정재권이 투입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지만 정재권은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돼 공을 한 번도 못 잡고 경기장을 떠났다. 당시 받은 충격이 컸다. 술이나 담배로 풀 수도 없는 운동선수인지라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정재권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후배 선수들에게 “일상을 회복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축구를 잊고 일부러 추억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와 마주앉아 첫 아이가 태어나던 때 이야기를 되새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즈음 정재권은 프로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1993년 드래프트 제도에 따라 정해진 팀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정재권은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 팀 중소기업은행에서 1년 동안 생활했다. 이듬해 드래프트를 통해 그토록 원하던 대우 로얄즈에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대우는 최고 명문 팀이었다. 정재권은 중학생 때 관전한 대우 경기에서 선발 멤버 11명이 모두 대표급인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우만 고집한 것도 그래서였다.
대우에서 보낸 다섯 시즌은 정재권의 축구 인생 황금기라 할 만하다. 특히 1997년 3관왕(정규리그, 아디다스컵, 프로스펙스컵)을 차지한 대우는 K리그 사상 가장 강한 팀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후보다. 정재권은 “그땐 원체 멤버가 좋았죠. 이틀 밤새고 경기해도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라고 했다.
최고의 순간은 1998년 8월이었다. 그땐 정규리그에도 연장전과 골든골 제도가 있었다. “LG를 상대로 0-1로 지고 있다가 제가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서 역전까지 만들었어요. 골든골 넣고 윗옷을 집어 던진 저에게 팬들이 다 내려와서 무등을 태워 줬어요. 그대로 운동장을 돌았어요. 모든 게 좋았죠. 날아갈 것 같았고. 그 많은 팬들이 내려와서 본인 일처럼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뭉클했어요.”
1997년 프로스펙스컵을 차지한 대우 로얄즈. 11번을 단 선수가 정재권.
유럽 진출, 내게도 멘토가 있었다면
“에이전트가 제 슛을 받아주면서 ‘이것밖에 안 되냐’고 했어요. 그래서 강도를 좀 올렸죠. 이번엔 너무 셌는지 ‘윽’ 소리를 내더라고요. 다음날 숙소에서 안 나오기에 연락을 해 봤더니 한참 있다가 기어 나왔어요. 원래 치질이 있었는데 그게 터졌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길로 혼자 귀국했어요. 포르투갈엔 저와 통역만 남았고.”
정재권은 3관왕 직후 포르투갈 1부 리그 팀인 비토리아 세투발에서 영입 제의를 받았다. 축구의 본토인 유럽은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선수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정재권은 대우 측에 해외 진출 의사를 강하게 표명했고, 선임대 후이적에 합의한 뒤 곧장 포르투갈로 날아가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에서 데뷔골이 터졌다. 이후에도 계속 선발 출장이 이어졌다. 축구 외적인 문제가 없었다면 그대로 유럽에서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미디 같은 사연 때문에 에이전트가 홀연히 떠나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지금처럼 통신이 자유로운 시절도 아니었다. 세투발은 하필 그때 계약 제의를 해왔다. 정재권은 에이전트 없이 협상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주급이 제때 나오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몇 주 정도 기다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정재권에겐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한국으로 전화해서 욕과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데 대우 측에서 “그럼 돌아오라”고 제안했다. 정재권은 통역을 통해 몰래 비행기표를 마련한 뒤 현지 물품을 숙소에 다 놔두고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야반도주였다. 정재권의 괴상한 유럽 진출은 겨우 3개월 만에 끝나 버렸다.
당시 사건으로 정재권이 얻은 교훈은 ‘조언해줄 만한 사람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는 에이전트를 잘 만나야 한다. 요즘 선수 중개인들은 회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담당자에게 급한 일이 생겨도 다른 직원이 일을 처리해줄 수 있어 1998년 당시보단 사정이 낫다. 정재권은 성급하게 복귀했던 것이 후회된다고 이야기했다. 일을 잘 처리해주는 것을 넘어 현명한 의사결정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에이전트보다 아쉬운 건 멘토의 부재였다. 정재권의 은사 중 각별한 유대관계를 쌓은 사람은 한양대에서 인연을 맺은 배기면 감독이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 우승도 배 감독이 이끌었다. 그러나 1992년 정재권이 올림픽대표팀에 차출된 사이 뇌출혈로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그 뒤로 여러 결정이 꼬일 때마다 정재권은 배 감독을 그리워했다. 대우에 입단하겠다며 프로 행을 1년 미뤘을 때도, 포르투갈에서 성급하게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 딱 한 명에게 의견을 물었다면 더 현명한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 터다. 한양대 감독으로 재직 중인 정재권은 ‘제자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할 만한 스승’이 되는 것이 큰 목표다.
“에이전트가 제 슛을 받아주면서 ‘이것밖에 안 되냐’고 했어요. 그래서 강도를 좀 올렸죠. 이번엔 너무 셌는지 ‘윽’ 소리를 내더라고요. 다음날 숙소에서 안 나오기에 연락을 해 봤더니 한참 있다가 기어 나왔어요. 원래 치질이 있었는데 그게 터졌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길로 혼자 귀국했어요. 포르투갈엔 저와 통역만 남았고.”
정재권은 3관왕 직후 포르투갈 1부 리그 팀인 비토리아 세투발에서 영입 제의를 받았다. 축구의 본토인 유럽은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선수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정재권은 대우 측에 해외 진출 의사를 강하게 표명했고, 선임대 후이적에 합의한 뒤 곧장 포르투갈로 날아가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에서 데뷔골이 터졌다. 이후에도 계속 선발 출장이 이어졌다. 축구 외적인 문제가 없었다면 그대로 유럽에서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미디 같은 사연 때문에 에이전트가 홀연히 떠나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지금처럼 통신이 자유로운 시절도 아니었다. 세투발은 하필 그때 계약 제의를 해왔다. 정재권은 에이전트 없이 협상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주급이 제때 나오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몇 주 정도 기다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정재권에겐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한국으로 전화해서 욕과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데 대우 측에서 “그럼 돌아오라”고 제안했다. 정재권은 통역을 통해 몰래 비행기표를 마련한 뒤 현지 물품을 숙소에 다 놔두고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야반도주였다. 정재권의 괴상한 유럽 진출은 겨우 3개월 만에 끝나 버렸다.
당시 사건으로 정재권이 얻은 교훈은 ‘조언해줄 만한 사람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는 에이전트를 잘 만나야 한다. 요즘 선수 중개인들은 회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담당자에게 급한 일이 생겨도 다른 직원이 일을 처리해줄 수 있어 1998년 당시보단 사정이 낫다. 정재권은 성급하게 복귀했던 것이 후회된다고 이야기했다. 일을 잘 처리해주는 것을 넘어 현명한 의사결정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에이전트보다 아쉬운 건 멘토의 부재였다. 정재권의 은사 중 각별한 유대관계를 쌓은 사람은 한양대에서 인연을 맺은 배기면 감독이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 우승도 배 감독이 이끌었다. 그러나 1992년 정재권이 올림픽대표팀에 차출된 사이 뇌출혈로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그 뒤로 여러 결정이 꼬일 때마다 정재권은 배 감독을 그리워했다. 대우에 입단하겠다며 프로 행을 1년 미뤘을 때도, 포르투갈에서 성급하게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 딱 한 명에게 의견을 물었다면 더 현명한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 터다. 한양대 감독으로 재직 중인 정재권은 ‘제자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할 만한 스승’이 되는 것이 큰 목표다.
정재권 감독은 제자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지도자를 꿈꾸고 있다.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은 있다
“대우가 없어지며 현대산업개발이 부산 팀을 인수했죠. 전 부산을 떠나겠다고 했어요. 대우가 아닌 팀에 남을 이유가 없었죠. 원래 안양 LG로 가려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포항에 갔죠. 당시 포항을 이끌던 박성화 감독님이 ‘힘들다, 좀 도와줘라’라고 하셨거든요. 남자의 한마디에 마음이 이끌리더군요.”
IMF 파동으로 인한 대우 그룹의 도산은 대우 로얄즈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팀을 옮긴 정재권은 2000년부터 2년간 포항 소속으로 뛰었다. 그러나 입단 직후 성적 부진으로 박성화 감독이 물러났다. 후임 최순호 감독과는 잘 맞지 않았다. 의욕까지 떨어진 정재권은 계약기간을 채운 뒤 새 팀을 알아보려 노력했는데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아 2001년 말부터 소속 팀 없이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코미디처럼 은퇴가 찾아왔다. 개인 훈련 중이던 정재권에게 김종부 당시 동의대 감독이 “우리 팀에 와서 몸을 만들어라”라고 권했다. 그래서 동의대로 찾아가 관계자들과 인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신임 코치로 인사하는 자리였다. 어안이 벙벙한 정재권은 “6개월 정도만 코치로 우리 팀을 도와주고 나서 다른 팀을 찾아가라”라는 제안을 엉겁결에 승낙했다. 그러나 이듬해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동래중에서 ‘놀러 오라’길래 식당으로 찾아갔는데 학부형 60여명이 앉아서 ‘신임 감독 정재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정재권은 그렇게 타의 반 타의 반으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주체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멘토의 부재가 아쉬운 시기였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 선수의 진로를 뒤바꾸는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 누구나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언해 줄 사람이 한 명 있다면 후회할 일은 줄어들 것이다. 정재권은 “후회는 없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다”고 했다.
정재권의 정확한 은퇴 시점은 2008년이다. 당시 한양대 코치였던 정재권은 대신고 축구부와의 연습경기 때 선수가 부족하자 유니폼을 입고 직접 뛰었다. 그 모습을 본 임근재 대신고 감독이 “내가 서울 유나이티드라는 K3리그 팀을 맡을 건데 네가 와서 경기도 뛰고, 얼굴마담 노릇도 좀 해라”라고 제안했다. 정재권은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되는 선수로 돌아와 현역 마지막 해를 치렀다. 많은 경기를 소화하진 못했지만 한양대 스케줄이 없을 때마다 잠실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삼아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감독이 된 지금 목표는 한양대를 “창의적이고 독특한 선수가 많은 팀”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고향 부산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하고, 대표팀 감독까지 도전하겠다는 것이 감독 정재권의 포부다.
그는 여전히 현역 생활을 흐지부지 마무리한 것이 한으로 남은 듯 보였다. “선수 생활의 끝맺음은 제대로 못 했어요. 지도자로선 확실한 끝맺음을 하고 싶어요.”
<정재권은...>
신장: 168cm
생년월일: 1970년 11월 5일
출생지: 부산
국가대표: 15경기 3골
프로 경력: 중소기업은행(1993), 부산 대우로얄즈(1994-1999), 비토리아 세투발(1998, 임대), 포항 스틸러스(2000-2001), 서울 유나이티드(2008)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공식매거진 <ONSIDE> 8월호 'PROFILE'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 = 김정용(풋볼리스트)
사진 = 대한축구협회, FAphotos
“대우가 없어지며 현대산업개발이 부산 팀을 인수했죠. 전 부산을 떠나겠다고 했어요. 대우가 아닌 팀에 남을 이유가 없었죠. 원래 안양 LG로 가려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포항에 갔죠. 당시 포항을 이끌던 박성화 감독님이 ‘힘들다, 좀 도와줘라’라고 하셨거든요. 남자의 한마디에 마음이 이끌리더군요.”
IMF 파동으로 인한 대우 그룹의 도산은 대우 로얄즈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팀을 옮긴 정재권은 2000년부터 2년간 포항 소속으로 뛰었다. 그러나 입단 직후 성적 부진으로 박성화 감독이 물러났다. 후임 최순호 감독과는 잘 맞지 않았다. 의욕까지 떨어진 정재권은 계약기간을 채운 뒤 새 팀을 알아보려 노력했는데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아 2001년 말부터 소속 팀 없이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코미디처럼 은퇴가 찾아왔다. 개인 훈련 중이던 정재권에게 김종부 당시 동의대 감독이 “우리 팀에 와서 몸을 만들어라”라고 권했다. 그래서 동의대로 찾아가 관계자들과 인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신임 코치로 인사하는 자리였다. 어안이 벙벙한 정재권은 “6개월 정도만 코치로 우리 팀을 도와주고 나서 다른 팀을 찾아가라”라는 제안을 엉겁결에 승낙했다. 그러나 이듬해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동래중에서 ‘놀러 오라’길래 식당으로 찾아갔는데 학부형 60여명이 앉아서 ‘신임 감독 정재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정재권은 그렇게 타의 반 타의 반으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주체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멘토의 부재가 아쉬운 시기였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 선수의 진로를 뒤바꾸는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 누구나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언해 줄 사람이 한 명 있다면 후회할 일은 줄어들 것이다. 정재권은 “후회는 없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다”고 했다.
정재권의 정확한 은퇴 시점은 2008년이다. 당시 한양대 코치였던 정재권은 대신고 축구부와의 연습경기 때 선수가 부족하자 유니폼을 입고 직접 뛰었다. 그 모습을 본 임근재 대신고 감독이 “내가 서울 유나이티드라는 K3리그 팀을 맡을 건데 네가 와서 경기도 뛰고, 얼굴마담 노릇도 좀 해라”라고 제안했다. 정재권은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되는 선수로 돌아와 현역 마지막 해를 치렀다. 많은 경기를 소화하진 못했지만 한양대 스케줄이 없을 때마다 잠실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삼아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감독이 된 지금 목표는 한양대를 “창의적이고 독특한 선수가 많은 팀”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고향 부산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하고, 대표팀 감독까지 도전하겠다는 것이 감독 정재권의 포부다.
그는 여전히 현역 생활을 흐지부지 마무리한 것이 한으로 남은 듯 보였다. “선수 생활의 끝맺음은 제대로 못 했어요. 지도자로선 확실한 끝맺음을 하고 싶어요.”
<정재권은...>
신장: 168cm
생년월일: 1970년 11월 5일
출생지: 부산
국가대표: 15경기 3골
프로 경력: 중소기업은행(1993), 부산 대우로얄즈(1994-1999), 비토리아 세투발(1998, 임대), 포항 스틸러스(2000-2001), 서울 유나이티드(2008)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공식매거진 <ONSIDE> 8월호 'PROFILE'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 = 김정용(풋볼리스트)
사진 = 대한축구협회, FAphotos
'축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아시안컵, K리거의 힘을 보여주다 (0) | 2015.08.18 |
---|---|
상경대학을 선택한 축구선수 정해상 대표 (0) | 2015.08.18 |
광주를 빛낸 '태극마크, 그 이름을 빛내다' 강연 (0) | 2015.08.18 |
‘시행 2년차’ 골든에이지에는 3가지가 있다! (0) | 2015.07.14 |
최영준 골든에이지 팀장,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후에 골든에이지 선수들이 한국축구를 이끌 것이다" (0) | 2015.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