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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이 규칙으로 정해지기 전까지 영국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축구를 즐겼다.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건 일상다반사!
기록에 따르면 11명 대 14명처럼, 인원이 다르게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이겼을까? 정답은 No!
수가 적은 쪽이 이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축구의 선구자였던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들이 배포한 '케임브리지 규칙'은 훗날 축구 규칙 통합에 영향을 끼쳤다.
출처: football-origins.com
14명이 가장 많은 건 아니었다. 유럽은 축구를 한겨울에도 한다.
남자들은 축구를 하기 위해 술로 몸과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그렇게 달아오른 경기장은 결국 선수 반, 취객 반!
너도나도 뛰어들어 게임이 끝날 무렵에는 무려 47명이 운동장을 누빈 적도 있었다.
1863년 제정된 최초의 경기 규칙에는 선수 수에 대한 규정이 없다.
출처: thefa.com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축구인들은 규칙을 손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대로 뒀다간 선수가 너무 많아 복잡해지고,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하던 영국 신사들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최초의 공식 국가대항전은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의 경기로 1872년 11월 30일 글래스고의 크리켓 운동장에서 펼쳐졌다.
출처: thefa.com
그것은 바로 크리켓!
야구와 비슷한 크리켓은 영국에서 축구보다 먼저 자리잡은 여름 인기 스포츠였다.
크리켓은 한 편이 11명으로 구성된다.
크리켓을 하는 사람이 축구를 했고, 축구를 하는 사람도 크리켓을 했으니
도 긴 개 긴!
그들이 느끼기에 11명은 축구를 하기에도 딱 좋았다.
다툼에 지쳤던 젠틀맨들은 아마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크리켓만 같아라~’ 하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최초의 국가대항전은 11 대 11로 겨뤘다. 국제 대회와 전국 대회를 위해서 동일한 선수 숫자는 공정성을 위해서 중요했다.
출처: scotishsporthistory.com
크리켓과 달리 축구는 몸싸움이 있어서 숫자 제한이 더욱 필요했다.
지금도 거칠지만, 초기 축구는 상상 이상으로 난폭했다.
공은 내버려두고 정강이만 걷어차는 선수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말 다했다.
그래서 매치가 끝나면 병원에는 뼈 부러진 환자들로 붐볐다는 충격적인 사실!
1873년 The FA Challenge Cup 우승배
출처: thefa.com
1863년 탄생한 축구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는 규칙도 함께 발표했지만,
"열한 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공식 규칙에 들어간 것은 1879년에 이르러서다.
"경기는 두 팀에 의해 이루어지며, 각 팀 선수는 열한 명을 초과할 수 없다"
최초의 규칙은 아주 단순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영국에서 흥행했던 축구협회배(The FA Challenge Cup) 대회를 통해
새 규칙들을 시험해 반영했고, 축구는 점점 더 안전하고 흥미진진해졌다!
written by.
김호철 K리그 명예기자
footballtobe11@gmail.com
김지현 K리그 명예기자
io_posso@naver.com
-참고 문헌
Christoph Bausenwein(2010), 『축구란 무엇인가』, 김태희 역, 민음인
[출처] [추꿍] "축구는 왜 11명이 할까?"|작성자 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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