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 “시련이 성장의 기회다”
투지의 아이콘, 마에조노를 ‘지운’ 사나이, 2002 한일 월드컵을 소리 없이 빛낸 이. 축구선수 최성용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최고와 최악을 모두 경험하며 순탄하지 않았던 축구 인생을 담담히 풀어나간 최성용은 ‘시련이 곧 금(金)’이라는 조언을 후배 축구인들에게 던졌다.
키가 작아도 좌절하지 않기
“학부형 회의에서 제 이름이 나오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성용이는 저렇게 작은데 선수를 할 수 있겠어요?’라더군요. 그 일을 계기로 철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저보다 큰 선수에겐 정말 지기 싫었어요. 작지만 깡이 있다고 해야 하나? 나보다 큰 사람보다 더 빨라야겠다. 나보다 큰 사람보다 오래 뛰어야겠다. 나보다 큰 사람보다 훈련을 많이 해야겠다. 그런 생각만 했죠.”
심판을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경기장을 찾아 다녔다. 동네 운동장 한 켠에서 아버지의 조기 축구를 구경하곤 했다. 최성용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다. 부모님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 뒤 금세 재미를 느꼈다. 그런데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43cm에 불과했던 작은 키였다.
마산중앙중 축구부에 가입했지만 1학년 때는 공을 거의 찰 수 없었다. 당시엔 ‘운동하면 키 안 큰다’며 체구가 작은 선수들은 열외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최성용도 그랬다. 문제는 숙소에 남겨진 그가 축구부원 모두의 이부자리 정리, 빨래 등 허드렛일을 도맡았다는 점이었다. 공을 못 차는 박탈감에 신데렐라라도 된 것 같은 고단함이 더해졌다. 초등학교 때 그를 지도했던 은사가 마산중앙중으로 합류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공을 찰 수 있었고 때맞춰 키도 자랐다. 최성용은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작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건 좋지 않다”는 지도 철학을 갖고 있다.
상처를 받은 날도 있었다. 학부형 회의였다. 부모가 생업을 위해 멀리 떠났기 때문에 최성용이 직접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그런데 회의장에서 먼저 나온 최성용은 어른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듣게 됐다. 지도자와 다른 학부형들이 자신의 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트집이 아니라 걱정 어린 이야기였을 수도 있지만, 최성용에겐 편견으로 다가왔다.
독기를 품고 노력한 최성용은 고등학교 진학 즈음엔 알아주는 엘리트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인근 축구 명문고들이 스카우트 경쟁을 벌였지만, 최성용은 마산중앙고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마산공고로 진학하게 됐다. 부모와 의견 충돌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진 유소년대표 선발 테스트를 통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U-16 대표 생활을 시작했다. 고려대로 진학한 뒤에도 연령별 대표 선발에서 빠지지 않았다. 부지런함과 투지는 한국 대표 선수라면 누구나 갖는 특징이지만, 최성용만큼 많이 뛰는 선수는 드물었다. 그는 어느새 널리 인정받는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해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친선경기에 나선 최성용의 모습.
마에조노를 지운 ‘한일전의 사나이’
“우리나라 선수들의 특징이 있죠. ‘착한 아이’라는 거.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는 거요. 전 전형적인 착한 아이였어요. 그래서 마에조노를 그 정도로 끈질기게 막을 수 있었겠죠. 제가 귀찮게 굴어서 마에조노가 벤치 쪽으로 도망가면, 저도 일본 벤치로 따라가요. 더위를 식히려고 물을 먹으면 저도 마에조노 옆에서 물을 먹어요. 그러다 일본 벤치의 물을 같이 마셨어요. 그 정도로 제 역할에 집중했죠.”
청소년 대표 경력과 함께 한일전이 시작됐다. 최성용은 연령별 대표를 거치며 여러 차례 일본과 맞붙었다. 19세 즈음엔 조 쇼지가 일본의 간판 공격수였다. 그리고 올림픽 대표 시절 그때 용어로 게임메이커인 마에조노 마사키요가 등장했다. 최성용을 추억하다 보면 늘 부록처럼 되새겨지는 이름이다.
1996년 3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축구 아시아 예선 결승전이 열렸다. 결승전이자 한일전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관심이 집중됐다. 이 경기를 앞두고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 최성용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훈련시켰다. 한국에서 가장 끈질기고 지구력이 좋은 최성용을 마에조노 대인마크용으로 쓰려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마에조노는 최성용에게 막혀 경기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최성용 역시 마에조노의 방어 외에 거의 한 것이 없었지만,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면 한국이 크게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한국은 시종일관 유리한 경기 끝에 2-1 승리를 거뒀다. 최성용은 경기 MVP로 선정됐다. 골을 넣은 이상헌, 최용수를 제치고 경기 내내 수비만 한 최성용이 상을 탄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최성용의 집념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뒤에도 최성용은 비슷한 역할을 여러 차례 수행했다.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에서 가나의 아코노르 찰스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1-0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 축구 사상 올림픽 첫 승이다.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기념 경기였던 2000년 4월 한일전에서는 나카타 히데토시를 붙잡고 함께 경기에서 사라졌다. 한국은 이때도 1-0으로 승리했다.
최성용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죠”라고 말한다. “그건 축구가 아니었어요. 제가 지도자라면 선수에게 그런 걸 지시하고 싶진 않아요. 현대축구엔 어울리지 않는 플레이죠. 그러나 그땐 칭찬도 많이 듣고, 제 플레이를 통해 우승도 했으니 기분 좋았어요. 마에조노를 막을 땐 저만 잘 하면 우승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최성용을 대표하는 또 다른 플레이는 오른쪽 측면에서 90분 내내 왕성한 활동량을 보이며 공수 양면에서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다. 킥의 달인까진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준수한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에 가담했을 때도 위협적이었다. 그가 가장 흐뭇하게 기억하는 어시스트는 1999년 3월 브라질전에서 김도훈의 선제 결승골을 이끌어낸 크로스다. 아시아 국가가 브라질을 꺾은 건 이때가 유일하다. 최성용은 이때 얼리크로스를 성공시킨 뒤 비슷한 플레이를 더 잘 할 수 있게 됐다. 일단 실전에서 한 번 성공한 기술은 “업그레이드” 된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벤치 멤버(오른쪽에서 세 번째)였던 최성용.
2002년, 최성용을 성장시킨 여름
“히딩크 감독님 시절에 ‘공포의 삑삑이’라는 훈련이 있었어요. 셔틀런이죠. 몸에 맥박을 재는 장비를 달고 정해진 훈련을 수행하며 체력을 측정하는 프로그램이에요. 그런데 저는 레이먼드 베르하이옌 코치가 ‘오케이 초이, 아웃’이라고 말한 뒤에도 계속 뛰었어요. 몸은 힘들지만 정신력으로 더 뛸 수 있으니까. 제가 계속 버티니까 결국 히딩크 감독님이 와서 절 밀어내시더라고요. 그때까지 한국 선수들에게 체력훈련이란 무조건 오래 버텨야 하는 일이었던 거죠. 물론 예외도 있어요. 운재 형 같은 경우엔 ‘넌 맥박이 140까지밖에 안 올라갔는데 왜 먼저 빠지나? 다시 들어와서 더 뛰어라’라는 말을 들었죠.”
최성용은 1997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먼저 상무에서 병역을 이행했다. 워낙 대표팀 차출이 잦았기에 ‘풀린’ 군생활이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도 군인 신분으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비록 결과는 참패였으나 최성용의 입지는 굳건했다. 같은 해 열린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8강전에서 홈팀 태국에 패배했다.
군 복무를 마친 최성용은 K리그가 아닌 일본행을 선택, 빗셀고베에서 2년간 활약했다. 일본과의 좋은 인연이 시작된 시기였다. 나중에 아내가 되는 유명 배우 아베 미호코도 이 시기에 만났다. 빗셀고베의 ‘감량 경영’으로 재계약이 무산된 최성용은 곧 유럽 진출을 추진했다. 먼저 독일의 아르메니아 빌레펠트 입단을 타진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았다. 결국 선배 수비수 강철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LASK 린츠 유니폼을 입었다. 오스트리아 리그 진출은 한국 축구 최초였다.
이때 최성용은 대표팀에서 한일 월드컵 엔트리에 들기 위한 경쟁 중이었다. 최성용은 히딩크 감독 부임 초기부터 대부분의 대표팀에 빠지지 않고 소집됐다. 2002년 수원 삼성으로 팀을 옮기며 변화가 찾아왔고,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무릎 부상을 당해 컨디션이 저하됐으나 모두 극복하고 본선 멤버에 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본선에선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오른쪽 윙백은 대회 내내 ‘히딩크의 황태자’로 불렸던 송종국의 차지였다. 최성용은 “지나치게 열심히 한다”는 말을 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과거 감독들에 비해 전술적인 움직임을 중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최성용은 “내가 갈 필요 없는 공간까지 이동하면 팀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였죠”라고 회고했다.
최성용은 벤치에 앉아있다 동료가 골을 넣을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나가곤 했다. 팬들에게 인사할 때도 적극적이었다. 영상을 본 지인들이 “뭐가 그리 좋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밝은 모습과 달리 숙소로 돌아오면 허무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최성용은 최근 열린 2015 유럽축구연맹 슈퍼컵에서 바르셀로나의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결승골을 넣고도 조만간 이적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우승 세리머니에 동참하지 못했던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월드컵 기간 동안 느낀 상실감은 최성용에게 이후 선수생활을 위한 정신적 전환점이 됐다. 정신적인 시련은 성장의 기회다. 이때 뭔가 느끼면 이후 살아가야 할 방향이 설정된다는 것이다. 최성용은 “월드컵 때 29세였는데, 그 뒤로 9년 더 운동하고 38세에 은퇴했어요. 아마 그 경험이 없었다면 더 일찍 은퇴했을지도 몰라요”라고 말했다.
최성용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수원에서 활약하며 각종 트로피를 쓸어 담았다.
‘온천 팀’에서 배운 것
“쿠사츠는 프로 팀이 된지 4년 만에 연승을 처음 했어요. 전 그때 우승이라도 한 줄 알았어요. 스태프, 선수들, 팬들이 다들 울더라고요. 저도 큰 감동을 받았죠. 이런 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어요. ‘아, 축구가 이런 거구나, 꼭 우승하는 팀만 감동이 있는 건 아니구나.’ 깨닫게 된 거죠.”
대표 경력은 한일 월드컵 이후 메이저 대회 경력 없이 끝났지만, 최성용의 프로 인생은 그때부터 전성기였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수원에서 활약하며 각종 트로피를 쓸어 담았다. 2002년 FA컵을 비롯해 3관왕, 2004년 K리그, 2005년 A3컵, 2006년엔 리그컵과 슈퍼컵 우승을 함께 했다. 특히 2004년은 최성용 스스로 35경기 1골 4도움을 기록하며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한 시즌이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05년엔 주장 완장을 찼다.
2006년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생활하기 위해 요코하마 FC로 이적한 최성용은 반 시즌 동안 뛰며 J2리그 우승과 승격에 일조했다. 반년 뒤엔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울산에서 1년간 활약한 그는 2008년부터 J2리그의 자스파 쿠사츠에서 3년간 활약하는 것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자스파 쿠사츠는 최성용이 성인 선수로서 겪은 팀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다. 팀 이름에 ‘스파’가 들어있는 이유는 온천 종사자가 주축이 된 팀이기 때문이다. 2004년 사회인리그(JFL)에서 돌풍을 일으켜 2005년 처음 프로에 진출했지만 어디까지나 소규모 구단이었다. 최성용 영입 전까지 최하위 언저리를 맴돌았다. 연습구장도 샤워장도 없었다. 원정 경기를 치른 뒤 경기에서 뛴 선수들은 신칸센을 타고 복귀하는 특혜를 누렸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거리가 멀어도 버스를 타고 복귀해야 했다.
최성용은 자신이 합류한 2008년, 역대 최고 성적을 낸 자스파 쿠사츠의 감동적인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최성용이 이 팀으로 돌아가면 직원과 팬 등 구단의 구성원들이 그를 환영해 준다고 한다.
최성용은 축구 인생이 끝나기 전 자스파 쿠사츠를 경험한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강조했다. 당장 명문 팀에 가지 못했다고 좌절할 것 없다는, 최성용이 어린 후배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전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좋은 팀에서만 운동했잖아요. 그런데 그 팀 동료들은 자전거로 2시간씩 출퇴근 해가며 운동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J2에서 상대팀으로 만난 배승진, 김동섭 같은 한국 선수들을 많이 봤죠. 그렇게 절박하니까 한 번 기회를 잡으면 놓지 않는 거예요.”
<최성용은...>
신장: 170cm
생년월일: 1975년 12월 25일
출생지: 경상남도 마산
국가대표: 65경기 1골
프로 경력: 빗셀고베(1999~2000), LASK 린츠(2001), 수원 삼성(2002~2006), 요코하마 FC(2006), 울산 현대(2007), 자스파 구사츠(2008~2010)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공식매거진 <ONSIDE> 9월호 'PROFILE'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 = 김정용(풋볼리스트)
사진 = 대한축구협회, FA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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