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

이기형, 전설의 오른쪽 수비수

용의꿈 2016. 1. 15. 12:32

이기형, 전설의 오른쪽 수비수

 

전설의 오른쪽 수비수 이기형

 

이기형은 레알 수원과 레알 성남에서 핵심선수로 뛰었다. K리그 최고의 오른쪽 수비수이자 킥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해외 축구까지 경험하며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독기와 우직함으로 한국 축구에 족적을 남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무시당하기 싫은 소년, 독기를 품다

“다른 애들은 축구를 하다 보면 부모님들이 와서 뒷바라지 해주고 감독님과 이야기도 나누잖아요. 용품이든 간식거리든 지원을 받기 마련인데, 저는 그게 없었어요. 내가 잘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열심히 하게 됐죠. 스스로 이겨내야겠다는 절실함이 있었던 것 같네요. 그렇죠. 독기. 그게 강했어요. 지는 걸 싫어하고 무시당하길 싫어하고.”

전라남도 화순 출신 이기형은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골 동네에서 논이든 밭이든 넓은 터만 있으면 공을 차고 놀았다. 형들과 어울릴 때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될 정도로 운동능력이 좋은 꼬마였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안타까운 가족사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6남매가 모두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 이기형은 축구와 연을 맺었다. 달리기가 빠른 그를 은로초등학교 축구부가 불렀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이기형은 별다른 고민이나 반대 없이 무난하게 축구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스스로 “저는 깊이 고민하는 머리보다는 순발력이 좋거든요. 공부 안 하고 축구 하길 잘했어요”라고 회상하기도 한다.

이기형이 기억하는 학창시절은 대부분 남들이 쉴 때 훈련을 더 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른 선수보다 빨리 발전할 수 있었어요. 갭이 컸어요. 그러다 보니 재미가 있어서 계속 나갔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담벼락이었다. 벽에 맞고 튕겨 나오는 공을 받는 연습을 했다. 실력이 붙은 후에는 계단 앞에 서서 첫 번째 계단, 두 번째 계단, 세 번째 계단을 차례로 맞히며 훈련했다. 학교 운동장에 흔히 묻혀 있는 타이어를 발등으로 차며 슈팅 자세를 가다듬기도 했다. 나중에 정확한 킥의 대명사가 된 첫 번째 비결이다. “그거, 재미있는 훈련은 아니에요. 지루한데 열심히 한 거죠.”

이수중학교, 신림중학교를 거쳐 국가대표 출신 박이천 감독이 이끌던 정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때부터 유망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공격부터 수비까지 요직을 두루 경험했고, 주니어대표(지금의 U-17 대표)에 선발됐다. 신이 난 이기형은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새벽에 자다 일어나 개인 훈련을 할 정도로 축구에 재미를 붙였다.

나중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강력한 킥도 수많은 개인훈련의 산물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타이어 특훈’으로 킥의 정확성을 키웠다. 고등학교 땐 그 시절에 흔히 하던 대로 산을 탔는데, 다리를 강화해야겠다는 어렴풋한 판단 때문에 늘 뒤꿈치를 들고 뛰었다. 이기형은 이 훈련이 발목과 무릎 근력을 강화해줬다고 믿는다. 결정적으로 킥이 좋아진 건 대학 들어서였다. 이기형은 고려대 축구부 시절 숙소 위에 있던 비닐하우스에 혼자 올라가곤 했다. 야구부원들이 쓰는 그물망을 향해 강슛을 날리는 훈련을 반복했다. “수비수가 골을 넣으려면 중거리슛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갖고 연습하다 보니 슛이 강해진 것 같아요.”

 

고려대를 졸업한 이기형은 신생 팀 수원 삼성에 입단한다. 수원은 신생팀이었지만 ‘레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화려한 선수 구성을 자랑했다.

 

다이너스티컵, 그리고 ‘레알 수원’

“고려대에 가서 처음 느낀 기분은 그냥 ‘우와’였어요. 우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훈련에 합류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정기전, 그러니까 고연전(연고전)을 앞두고 속초에서 합숙할 때 고등학생으로 참가했죠. 그런데 이임생, 서정원, 김병수, 김봉수 선배 등등 다 국가대표인 거예요. 엄청나게 긴장했고, 제가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그때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겁이 났어요.”

이기형이 청소년기에서 벗어나 성인 축구 팀에 들어간 건 수원 삼성 입단에 앞서 고려대 시절부터다. 그는 1996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 세대다. 당시 축구협회는 올림픽 대표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해외 전지훈련 위주로 팀을 운영했다. 각국을 돌며 훈련과 연습경기를 치르다 보면 몇 달이 훌쩍 지났다. 황선홍, 최용수, 하석주, 윤정환 등 한국 축구사에 남을 동료들이 곁에 있었다. 축구만 생각할 수 있어 행복한 시기였다. 그 팀은 인기도 많았다.

축구협회는 올림픽대표팀을 타국 A대표팀과 맞붙는 대회에 참가시켜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기형은 21세의 나이에 칼스버그컵과 다이너스티컵을 소화하며 대표선수로 첫발을 뗐다. 그중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을 상대한 결승전은 지금도 지인들이 “너 그때 대단했다”고 말해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전반 26분 이우형이 코너킥을 땅볼 패스로 내줬고, 후방에서 달려들던 이기형이 골대와 약 30m 떨어진 곳에서 쭉 뻗는 슛을 날려 골망을 찢을 듯 흔들었다. 4번째 A매치에서 터진 데뷔골로 이기형의 오른발은 뭇 사람에게 알려졌다. 이기형은 이날 한 골을 더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으나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놓쳤다.

이듬해 이기형의 프로 인생이 시작됐다. 그의 첫 팀은 신생 팀 수원 삼성이었다. 신생 팀 우선지명권을 가졌던 수원은 이기형뿐 아니라 박충균, 이운재, 이병근 등 스타급 대졸 6명, 실업 출신 박건하, 고졸 고정수 등을 쓸어 갔다. 좋은 선수가 많이 쏟아지는 1996년을 노려 창단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기형은 일본 프로팀에서도 제안을 받았으나 굴지의 대기업이 창단하는 수원에 더 매력을 느꼈다. “프로 데뷔하고 4년 정도 지나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부상을 당해서 일 년 반 동안 쉬고 있으려니 ‘일본에 갔어야 했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때쯤에는 너도나도 일본으로 진출했거든요.”

‘레알 수원’의 일원으로서 프로축구에 새 바람을 일으켰던 이기형은 1999년 말 십자인대 부상을 당해 일 년 넘게 쉰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전급으로 활약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경기들이 있다. 하나는 1999년 포항스틸러스전이다. 그때 수원은 거푸 3골을 내주고 궁지에 몰렸는데 3번째 골이 이기형의 자책골이었다. 크로스를 걷어내려고 점프했는데, 자기 골문을 향해 멋진 헤딩골을 집어넣고 말았다. 그런데 후반전이 되자 서정원의 2골과 이병근의 골로 수원이 동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후반 35분, 이기형이 늘 시도하는 오른쪽 측면에서의 중거리슛이 포항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국 축구사에 남을 4-3 대역전 경기다. “요즘 선수처럼 멋진 세리머니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경기장을 막 뛰어다녔는데 무릎을 이만큼 차올리면서 엄청나게 방방 뛰었어요. 그만큼 기뻤죠.” 이해 수원은 리그컵 2개를 포함해 국내에서만 4개의 트로피를 모두 휩쓸어 전관왕을 달성했다.

이기형이 주인공이었던 경기는 2002년 아시안슈퍼컵 결승 1차전도 있다. 알힐랄을 수원월드컵경기장으로 불러들인 수원은 1-0 신승을 거뒀는데, 중앙도 아닌 사이드라인 근처 측면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를 이기형이 그대로 차 넣었다. 각도가 좁은데다 30m도 넘는 거리였다. 해외토픽에서나 볼 법한 진귀한 장면이 탄생했다. “원래 올려야 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상대 골키퍼가 완전히 반대쪽으로 가 있는 게 보였어요. 순간 ‘강하게 때리면 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침 벤치에서 최강희 코치님이 ‘때려라’라고 하셨어요. 제 마음대로 슛을 날렸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벤치에서도 슛을 지시하셨으니 자신감이 생겼죠. 그래서 슛을 때렸어요. 골키퍼가 반대쪽으로 한 걸음 가다가 뒤늦게 막으러 오면서 골을 먹은 거죠.”

이 장면은 공중파 중계로 더 유명해졌다. 지금도 당시 골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기형 특유의 직선 강슛이 아니라 살짝 휘어지는 킥이었다. “그때만 해도 요즘 호날두처럼 차는 기술이 없어서 전 쭉쭉 뻗는 슛을 차곤 했어요. 그런데 매번 그것만 하니까 잘 막히더라고요. 휘어지는 킥을 연습한 것이 그 즈음이죠.” 당시 이기형을 비롯한 수원 선수들은 아시안슈퍼컵에서 우승하면 클럽월드컵에 나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대회 자체가 취소되며 세계 대회의 꿈도 함께 무산됐다. 클럽월드컵은 2005년 지금과 유사한 형태로 재출범하게 된다.

 

국내 최고의 오른쪽 수비수였던 이기형은 A매치 47경기를 소화했으나 정작 중요한 대회에서는 중용되지 못했다.

 

월드컵을 놓친 K리그 대표 수비수

“수원과 성남에서 정말 강한 팀을 많이 경험했죠.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팀을 하나 고른다면 성남에서의 첫해, 그러니까 2003년이에요. 그때 선수와 전술 등 모든 게 가장 강했어요. 지금 저와 함께 생활하시는 김도훈 감독님부터 정환이 형, 신태용 감독님, 데니스, 김대의 같은 선수가 다 한 팀에 있었죠. 경기에 나가면 거의 이기는 식이었어요. 지금 전북이 비슷한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수원에서 7년째 뛰던 2002년 말, 이기형과 구단의 계약이 만료됐다. 양측은 연봉 문제로 조금씩 갈등을 겪던 중이었다. 이기형은 “수원은 내 이적료를 지불할 만한 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연봉 제시액이 기대에 못 미쳤다고 밝혔다. 당시엔 자유계약 대상자라도 K리그 규정에 따른 이적료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남이 압도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마침 애틀랜타올림픽 트레이너 출신인 김학범 성남 코치와 인연이 있었다. 김 코치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성남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김 코치는 차경복 감독과 잠시 상의하더니 한 시간 만에 “와라”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때 이기형은 스물여덟이었다. 전성기에 돌입한 K리그 최고 오른쪽 수비수가 ‘레알 수원’에 이어 ‘레알 성남’에 합류했다.

성남에서 보낸 2년은 순탄한 편이었다. 주전급으로 뛰며 무난하게 K리그 우승과 하우젠컵 우승을 한 번씩 달성했다. 수원과 달리 성남 생활이 짧았던 건 감독 교체 때문이었다. 김학범 코치가 감독으로 올라가던 해, 성적 부진으로 인해 선수단에 “찬바람”이 불었다. 마침 FC 서울에서 영입 제안이 왔다. 김학범 감독도 수락했다. 그런데 서울의 상황이 급변했다. 원래 외국인 감독을 내정해 두고 그의 입맛에 맞는 이기형을 미리 영입한 건데, 감독 선임에 문제가 생겨 부랴부랴 이장수 감독에게 지휘봉이 넘어갔다. 이때부터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2005년에 16경기, 2006년에 17경기 출장이 전부다.

“서울에서 왜 그렇게 됐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주어진 환경에서 묵묵히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서울 시절인 2006년엔 컵대회에서 우승했어요. 그 대회는 제가 거의 다 뛰었죠. 그렇다면 정규리그에서도 기회를 받을 만하지 않나요? 제게 돌아온 건 다시 2군으로 가라는 지시였어요. 감독님이 보기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겪은 2군이라 좀 힘들었죠.”

그것이 K리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동안 태극마크도 이기형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지길 반복했다. 그는 47경기 6골로 꽤 많은 출장 기록을 갖고 있지만 정작 A대표로서 남긴 족적은 다이너스티컵 이후 희미하다. 대회 본선마다 불참했기 때문이다. 1998 프랑스월드컵 예선 때 붙박이 라이트백으로 뛰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본선 명단엔 들지 못했다. 차범근 감독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이기형은 대회를 시청하지 않았고, 이웃집의 환호성 소리도 듣기 싫어 한동안 산속에 틀어박혔다.

2002 한일월드컵 역시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참가할 수 있었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 초창기에는 십자인대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더 아쉽다. 십자인대 부상은 원래 6개월 만에 나을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재활 훈련을 하다 무리하는 바람에 수술에 들어갔고, 그렇게 6개월씩 두 번 회복기간이 연장돼 결국 일년 반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이때만큼은 독기가 아니고 독이었다.

2004 아시안컵도 예선은 주전으로 소화했으나 ‘오만 쇼크’ 등 혼란기 속에서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고, 역시 본선행엔 실패했다. 2003년 10월 네팔을 7-0으로 대파할 때 2골을 넣은 것이 이기형의 마지막 A매치였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이기형 코치는 축구를 즐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인천 선수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뉴질랜드에서 참가한 클럽월드컵

“두바이에서 클럽월드컵을 했는데 저희가 홈팀을 이겼어요. 대회에 초를 친 거죠. 흥행을 망쳤다고도 할 수 있고. 하하. 그렇게 본선에 진출했고, 북중미팀과 가진 첫 경기에서는 졌지만 5, 6위 결정전에서 아프리카 대표 마젬베를 꺾었어요. 오세아니아 축구를 세계에 알린 거죠. 그때 제 나이가 서른여섯(만 35세)이었는데, 어시스트도 하나 했어요.”

서울과 2년 계약을 마친 후 K리그 중하위권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연봉을 깎아가며 국내에 남기보다는 외국의 축구를 경험하고 싶었다. 호주에서 뛰던 신태용에게 물어 뉴질랜드로 향했다. 당시 세미 프로 수준이던 뉴질랜드 리그는 일주일에 3일만 훈련하던 비교적 여유로운 곳이었다. 남는 시간 동안 공부도 할 수 있고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클랜드 시티는 매력적이었다.

이기형은 오클랜드 시티에서 생각보다 긴 3시즌 동안 활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선수로 성장한 이기형은 뉴질랜드의 세미 프로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인 경험을 갖고 있었다. 힘든 측면수비수를 떠나 팀 플레이를 조율하는 중앙 플레이메이커로 역할을 바꿨다. 이기형의 킥으로 공격이 전개됐고, 세트피스도 이기형이 도맡아 처리했다. 2008/2009시즌 뉴질랜드챔피언십과 오세아니아축구협회(OFC)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우승해 클럽월드컵 참가 권한을 얻었다.

2003년 무산된 클럽월드컵이 이기형에게 뒤늦게 찾아왔다. 홈팀 알아흘리를 플레이오프에서 꺾은 오클랜드는 준준결승에서 북중미 대표 아틀란테(멕시코)에 0-3으로 패배했다. 대신 마젬베(콩고민주공화국)을 5, 6위 결정전에서 꺾고 오세아니아 팀 최초로 클럽월드컵 승리를 기록했다. 후반 막판에 2골을 몰아쳐 3-2 역전승을 거둔 극적인 경기였다. 이기형은 제이슨 헤인이 넣은 첫 골을 어시스트했다.

“오클랜드에선 많이 뛰지 않고 자리만 지키며 수비하는 편이었는데 클럽월드컵에선 경기 내내 뛰어다니며 수비하느라 참 힘들었어요. 굉장히 빠르고 밝은 친구(헤인)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골키퍼를 제치고 골을 넣더라고요. 그게 제 어시스트가 됐죠.”

뉴질랜드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태도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하게 공을 찼던 자신과 달리, 뉴질랜드 선수들의 열정은 순수한 즐거움에서 나온다는 걸 느꼈다. 축구가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는 걸 그때 알았다.

당시 경험은 지도자가 된 지금 큰 영향을 미친다. 그가 선수들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네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기며 모든 걸 쏟고 나온다면 아무도 우릴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2015년에 인천 유나이티드는 객관적 실력을 뛰어넘은 활약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코치 이기형은 인천 선수들도 축구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이 결합됐을 때 실력 이상을 발휘한 거라고 믿는다.

PROFILE
이름 - 이기형
신장 - 181cm
생년월일 - 1974년 9월 28일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
국가대표 - 47경기 6골
프로 경력 - 수원 삼성(1996~2002), 성남 일화(2003~2004), FC 서울(2005~2006), 오클랜드 시티(2007~2010)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공식매거진 <ONSIDE> 1월호 'Profile'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김정용(풋볼리스트)
사진=FA 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