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열, K리그 최다우승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미드필더
역대 K리그 최다우승자는 누구일까? 대부분은 화려한 선수들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정답은 박남열 이천대교 감독(이하 박남열). 박남열은 빛나지는 않았지만, 소금 같은 활약으로 K리그 우승컵을 7번이나 팀에 선물했다.
1999년 일화의 FA컵 우승. 맨 왼쪽이 박남열
K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박남열은 겸손하다. 기록으로는 K리그 역대 최고라는 신태용 국가대표팀 코치 겸 올림픽대표팀 감독보다도 우승컵을 하나 더 보유하고 있지만, “운이 좋았다”라는 이유를 댈 뿐이다. 박남열은 성남 일화(성남 FC의 전신)에서 6회 우승을 맛봤고, 수원 삼성에서 우승컵을 한 번 더 들어올렸다.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뛰면서도 주전 자리를 거의 놓치지 않았다. 2004년 부상을 당했을 때와 2004년 수원에서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올릴 때를 제외하면 우승했던 모든 시즌에 20경기 이상 뛰었다.
박남열을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공을 상당히 잘 찼다.” 박남열은 다른 모든 칭찬과 찬사에는 손사래를 쳤지만, 이 표현에는 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공을 못 찬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않았다.” 박남열은 골을 넣는 공격수와 체격 조건이 압도적인 수비수들이 각광받는 시대를 기술로 헤쳐온 이였다. 프로 통산 250경기에 출전해 40골 24도움을 기록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19경기에 출전해 1골을 넣었다.
간 큰 고3, 대구대를 선택하다
박남열은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보냈다. 그의 표현대로 “공도 곧잘 찼기” 때문에 서울에서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다. 경희고를 거쳐 경희대로 가는 길이 보장돼 있었다. 그런데 박남열은 경희대가 아닌 대구대를 선택했다. 당시 창단 2년 밖에 되지 않았던 대구대를 선택한 이유는 예상보다 특별하지 않았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희고에 다니면서 경희대 훈련을 많이 봤다. 경희대는 엄하기로 유명한 팀이었고, 엄청나게 많이 뛰는 축구를 했다. 그곳에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구대를 택했다.”
대구대 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타지 생활은 고됐고, 3학년이 될 때까지는 경기에 나서기도 어려웠다. 주변 환경도 좋지 않았다. 박남열은 축구 자체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당시에는 학교 정문도 없었다. 모든 게 갖춰지지 않은 학교였다. 정말 깜짝 놀랐다. 믿기지 않겠지만 학교 안에 포도밭, 사과밭이 있었다. 농부들과 같이 학교에 다닌 것이다(웃음). 고등학교 때 캠퍼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희대 안에 있는 학교를 다녔기에 실망은 더 컸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겹치면서 선수 생활의 고비도 왔다. 그래서 부모님께 힘들다고 말씀 드렸는데, 부모님은 ‘힘들면 그만두고 올라오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그만두라는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해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봤다.”
박남열은 경기를 뛰지 않았던 시간을 잘 활용했고, 그 시간이 이후 선수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마르고 힘이 없었던 박남열은 대학교 시절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면서 선수 생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박남열은 “당시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대학 시절에 축구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 힘과 스피드가 붙으면서 다른 선수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남열은 4학년 때 주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프로로 가는 길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당시 천안 일화(현 성남 FC, 이하 성남)와 연습경기를 많이 했다. 박종환 감독님이 나를 잘 봐줬다. 은행 팀들이 많았던 시기라 그쪽에서도 입단 제의가 오기도 했다. 결국 드래프트를 통해 천안 일화(1993년)에 입단했다.”
1996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한 박남열, 1998년 제대 후에도 성남의 성적은 좋아지지 않았다가 2000년부터 조금씩 살아났다
입단과 함께 K리그 3연패
박남열은 입단과 함께 주전 자리를 꿰찼다. 중원에서 공수의 연결고리를 담당했고, 곧잘 골도 넣었다. 당시 성남은 포항과 함께 K리그에서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남에는 고정운, 이상윤, 신태용 등이 버티고 있었고, 포항에는 황선홍, 홍명보, 라데가 있었다. 경기 내용이나 선수 구성을 봤을 때는 포항이 조금 더 나았지만, 성남은 박남열이 입단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를 3연패했다. 박남열은 프로 데뷔 첫 해에 27경기에 출전해 3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우승을 도왔고, 신인왕 후보에도 올랐다. 당시 신인왕은 부산 대우의 정광석에게 돌아갔다. 박남열은 1994년에 27경기 4골 2도움, 1995년에는 24경기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성남 왕조에 한 부분을 당당하게 담당했다.
“나는 팀의 양념 같은 역할을 했다(웃음). 주전이었지만 빛나지는 않았다. 우리가 처음 3연패를 할 때는 사실 포항이 더 잘했다. 홍명보, 황선홍, 라데가 포항에 있었는데 선수 레벨도 그렇고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그랬다. 리그에서는 항상 포항이 우리보다 조금씩 더 앞섰는데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리가 이기는 식이었다. 우리는 모 아니면 도였다. 지면 죽고 이기면 산다는 절박함을 안고 뛰었다. 그런 특징이 팀을 강하게 만든 것 같다. 포항이 우리보다 공은 잘 찼지만, 우리에게는 한 방이 있었던 거다.”
국가대표 데뷔 그리고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박남열은 프로 데뷔와 함께 우승컵만 들어올린 게 아니다. 대표팀에도 발탁됐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호 감독은 대학 시절부터 박남열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고, 박남열이 프로에 데뷔한 첫 해에 대표팀으로 불러들였다. 공격과 수비 양극단만이 존재하던 시기에 김호 감독은 연계와 기술에 소질이 있는 박남열에게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물론 박남열은 이번에도 “김호 감독님이 잘 봐주셨다.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로 자신의 선발 이유를 설명했다.
“대학교 4학년 때 김호 감독님이 우리 학교에 잠깐 오셨다. 축구에 대한 이야기,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김호 감독님께서는 내 공 차는 스타일을 맘에 들어 했는데, 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많이 먹어라. 체중을 불려야 한다’와 같은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셨던 것 같다. 내가 대표팀에 들어갔을 때는 조금 특별한 시기였다. 김호 감독님은 어린 유망주를 많이 뽑아서 1994 미국 월드컵보다도 1998 프랑스 월드컵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명문대 소속 선수뿐 아니라 나 같은 지방대 출신 선수들까지 골고루 선발했다. 그 당시 기준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호 감독님이 축구에 대한 열정이나 지식이 남달랐기 때문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박남열은 1993년 3월 9일 캐나다와의 친선전을 시작으로 대표팀 경기에서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1994 미국월드컵 아시아지역 1차예선에서는 4경기를 뛰었다. 3-0으로 이겼던 바레인과의 경기에서는 A매치 데뷔골(이자 유일한 골)을 터뜨렸다. 박남열은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황선홍, 홍명보, 고정운과 같은 선배들과 뛰면서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골을 넣었던 장면은 이제 생각이 안 난다”라며 웃었다.
국가대표팀 경력의 하이라이트는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었다. 당시에는 연령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 나갔다. 한국은 승승장구하며 토너먼트 라운드에 진출했고, 박남열은 네팔,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경기에 출전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8강에서 일본과 명승부를 벌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본을 3-2로 꺾었다. 황선홍의 주먹 세리머니는 아직도 경기를 봤던 이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박남열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일본전은 어려운 경기였다. 나는 한 10분 정도 뛰었다. 측면 수비수(윙백) 한정국이 다리에 경련이 나서 교체가 필요했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비쇼베츠 감독님이 나보고 몸을 풀라고 하더라(웃음). 아직도 왜 나를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들어가서 정말 정신 없이 뛰었다. 긴장을 많이 해서 어떤 장면이 있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정말 길게 느껴졌다. 짜릿한 승리였다. 그렇게 멋지게 이기고 올라갔는데 8강에서 우즈베키스탄에게 어이없게 골을 내주고 졌다. 그 골이 들어가는 순간 정말 뒤로 넘어갔다(웃음). 아마 여럿이 그 순간 좌절했을 것이다. 꼼짝없이 군대에 가야 했으니까.”
선수 시절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박남열
두 번째 3연패, 부상 그리고 은퇴
성남은 1996년부터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박종환 감독이 팀에서 떠나면서 이장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박남열은 1996년 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했고, 1998년 제대했다. 박남열이 제대한 이후에도 성남의 성적은 좋아지지 않았다. 주축 선수들이 모두 이적한 공백을 제대로 메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네 감독과 차경복 감독도 팀을 구하지 못했다. 박남열은 “당시 정말 성적이 바닥을 쳤다”라고 했다. 성남은 2000년부터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김대의, 김현수, 박강조, 김도훈 그리고 샤샤 등을 공격적으로 영입하며 2001, 2002, 2003 시즌 다시 3연패를 차지했다. 박남열은 팀의 고참으로 우승을 도왔다. 공격과 수비의 가교 역할을 했고, 지난 3연패 때와 같이 조명을 받지 못했다.
“두 번째 3연패를 할 때는 우리 멤버가 워낙 좋았다. 샤샤, (김)도훈이도 있었고, 우리를 넘어설 팀이 없었다. 나는 당시에도 주축이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뛰어난 선수들이 워낙 많았다. 지금이야 기성용, 구자철 같은 미드필더들이 각광을 받지만 당시에는 골을 넣는 공격수들이 거의 모든 관심을 가져갔다. 나처럼 수비도 하고 공격도 하는 선수를 특이하게 보던 시절이었다. 주위에서도 한 1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더 빛을 많이 봤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뭐 시대가 그랬는데 어쩌겠나?(웃음)”
2003년, 여섯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린 박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시즌 중반 오른쪽 무릎 연골을 다쳐 독일로 넘어가 수술을 했는데, 재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문제가 돼 물렁뼈를 다시 다쳤다. 당시만 해도 재활이라는 개념이 확실치 않았다. 박남열은 그 과정에서 구단과도 마찰을 빚었다. 박남열이 시즌 중에 다시 피로골절을 입었을 때 구단과 박남열의 의견이 엇갈렸던 것. 성남에서 여섯 번이나 우승컵을 차지했던 박남열은 팀을 떠나야 했다. 그는 “은퇴할 마음”이었지만, 선수 생활은 생각지 않은 곳으로 이어졌다. 박남열은 다음 해에 수원 삼성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이)상윤이 형에게 전화가 왔다. 차범근 감독님이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셨다고 했다. 사실 몸이 계속 올라오지 않고 있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창피하기도 했다. 34살에 테스트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테스트를 봤고, 6개월 단발 계약을 맺었다. 수원에 가니까 정말 모든 게 달랐다. 진짜 프로 팀에 온 거지. 성남은 정말 모든 게 열악했다. 그런데 수원은 숙소, 식당 그리고 먹는 것까지 정말 프로 팀이었다. 잘 적응이 안되더라(웃음). 좋아하는 (서)정원이 형도 있고, 절친한 (박)건하도 있고, 정말 친한 후배들도 많았다. 좋은 선수도 있고, 분위기도 좋은데 나한테는 맞지 않는 옷이었던 것 같다. 10년이나 입은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좀 더 어렸을 때 왔다면 운동에 더 전념할 수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6개월간 재미있었다. 3경기 뛰고 우승컵도 얻고. 후배들이 내게 ‘우승컵이 따라다닌다’라고 하더라.”
기록만보면 누구도 부럽지 않을 선수 생활이었지만, 박 감독은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마무리를 잘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구단과의 문제에서도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시작은 잘 했는데 은퇴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박 감독은 그 아쉬움을 덮고 남을 정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지금은 돈을 많이 주면 팀을 바꾸는 시대지만 우리 시대에는 팀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중요했다. 나는 우승을 많이 했고, 거기서도 주역이었다. 스타는 아니었지만, 함께 뛰었던 이들이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공을 찼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FACT FILE
이름 박남열
신장 180cm
생년월일 1970년 5월 4일
국가대표 19경기 1골
프로 경력 성남 일화 천마(1993~2003),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3~2004)
*이 글은 대한축구협회 공식매거진 <ONSIDE> 12월호 'Profile'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류청(풋볼리스트)
사진=FA photos